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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아이디어 하나가 세계를 움직인다, 크리스마스 씰 이야기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연말이면 연하장이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준비하던 시절이, 우표와 함께 씰을 사려고 줄을 서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요즘도 결핵이 있어요?” “크리스마스 씰이 아직도 나와요?”

 

씰은 진화를 반복하며 여전히 발행되고 있다.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일이 적어져 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취지는 120년 전 덴마크의 한 우체국 직원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 그대로다. 씰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2021년 크리스마스 씰은 MBC <놀면뭐하니?>와 콜라보해 씰과 키링, 머그컵 등 다양한 형태로 발행됐다, 대한결핵협회 제공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샀던 기억이 언제인가. 씰은 결핵 퇴치를 위해 무려 120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 지구적 모금 운동이다. 우리는 지금 씰은커녕 우표를 살 일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수집가가 아닌 다음에야 크리스마스 씰을 사 우표 옆에 가지런히 붙일 때의 뿌듯함을 잊고 살 수밖에 없다.


과거 국내 최초로 씰을 발행하던 시절처럼 결핵을 유전병으로 아는 사람, 씰을 가슴에 붙인 채 결핵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다만 ‘요즘도 결핵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누군가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씰이 나오느냐’고도 한다. 씰은 지금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아쉽게도 결핵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연말을 맞아 한때 온 국민에게 ‘최소한의 기부’와도 같았던 크리스마스 씰의 역사를 살펴본다.

 

한 사람의 따뜻한 아이디어, 전 세계적 모금 운동 되다
먼저 세계 최초의 씰이 나오던 19세기 말, 유럽으로 가보자. 19세기 말은 산업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했던 시기다. 덴마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성이 착하고 어린이를 좋아했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 직원 ‘아이날 홀벨’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중 연말에 쌓인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던 그는 작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동전 한 닢짜리 작은 그림을 만들어 우표와 함께 붙여 보내는 캠페인을 하면 어떨까? 모인 동전으로 결핵 퇴치 기금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최초의 씰을 발행한 아이날 홀벨(좌). 본문에는 직원이라고 썼지만, 우체국장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긴 일개 직원이었다는 것보다는 신빙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게다가 관상과 눈빛도 국장이 어울리기도 하다. 오른쪽은 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씰이다. 바로 이 씰 한 장이 세상의 연말을 바꿨다.

 

그의 아이디어는 덴마크 국왕 ‘크리스천 9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마침내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로 세상에 나왔다. 그의 소박한 발상은 많은 덴마크인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었고, 후에 전 세계가 함께 할 크리스마스 씰 모금 운동의 원형이 됐다.


덴마크 넘어 신대륙 건너간 씰, 세계를 움직이기 시작하다
어느 날 덴마크에서 발행된 크리스마스 씰이 붙은 편지 하나가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갔다. 덴마크계 미국인 작가 ‘자콥 리이스’는 고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에 붙은 씰을 보고 크게 감명받는다. 형제 중 6명을 결핵으로 잃은 그는 결핵의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핵 기금 마련을 위한 씰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에밀리 비셀과 함께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한 병원의 운영비를 마련하는 씰 모금 운동에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두 사람의 의지에 감동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1907년 미국 최초의 씰이 ‘윌밍톤 우체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호응도가 낮았다.

 

이에 에밀리는 신문사를 찾아가 ‘씰 운동을 기사에 실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마침내 마음이 움직인 편집장은 씰 운동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냈다. 지역사회 언론을 통해 씰 운동 이야기가 전달되면서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의장이 모금에 앞장섰고, 시민들의 참여도 본격화했다.

 

각국의 초판 씰의 모습, 대한결핵협회 제공<br>
&nbsp; &nbsp; (왼쪽부터) 노르웨이(1911), 프랑스(1927), 영국(1933), 인도(1955), 캐나다(1957)

 

씰 운동, 유럽 전역 일파만파...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움직여

덴마크와 미국에서 씰 운동이 성과를 거두자 곧 스웨덴, 독일, 노르웨이 등 주변국이 뒤따랐다. 1912년에는 루마니아까지 전파됐다. 아시아에서는 1910년 필리핀이 가장 먼저 씰을 발행했고, 1924년에는 일본 결핵예방회도 뒤를 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씰 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1925년 이후로는 프랑스, 벨기에, 체코, 영국, 포르투갈, 폴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와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콜롬비아, 쿠바, 파나마,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국가는 물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중동지역, 남아프리카와 튀니지 등의 아프리카 대륙까지 운동이 퍼져나가며, 세계 120여 개국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인류 공동의 적, 결핵 “로렌 십자로 맞서자”
씰에 항상 들어가 있는 상징이 있다. 빨간색 ‘복십자’다. 십자가는 아니지만 비슷한 모양의 상징이 그려져있고, 명칭도 ‘크리스마스 씰’이니 씰 운동이 기독교에서 출발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붉은 십자 상단에 가로획이 하나 더 있는 복십자는 실제로 9세기경 한 그리스도 교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이후 제1차 십자군 지휘관인 ‘로렌 공’이 이를 방패 문양으로 쓰면서 평화와 희망의 표상이 돼 ‘로렌 십자’로도 불렀다.


‘제1회 국제결핵예방회의(베를린, 1902)’에서 “인류 공동의 적인 결핵과의 싸움에서 로렌 십자를 국제 상징으로 삼자”는 프랑스 대표의 제안에 만장일치로 결의된 후로 로렌 십자는 결핵 예방 운동에 있어 만국 공통의 기치가 됐다.

 

한국 최초의 씰을 발행한 셔우드 홀. 대한민국 초판 씰의 모습, 대한결핵협회 제공


한국 최초 씰 창시자, 셔우드 홀 “씰 붙여봤는데도 결핵이 안 나아요!”


셔우드 홀은 1932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며 다음과 같이 발행 취지를 밝혔다.

 

“첫째로 한국인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둘째로 부자든 가난한 이든 모두 살 수 있도록 저렴한 씰을 만들어 만인을 항결핵운동에 참여시키며, 셋째로 재정이 절실한 결핵퇴치사업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다.”

 

실제로 초창기 크리스마스 씰 모금은 결핵에 대한 교육과 홍보 목적이 컸다. 우리나라 환경이 결핵이라는 병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기 때문이다.


결핵을 앓던 한 여인이 씰을 가슴에 붙인 채 셔우드 홀을 찾아와 “선생님, 씰을 이렇게 가슴에 붙였는데도 결핵이 낫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한 일화는 결핵에 대한 낮은 인식과 기부 개념이 없던 당시 사회상을 보여준다.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질환인 결핵이 가족 간 전염을 일으키자 이를 유전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하니 ‘방역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크리스마스 씰의 홍보물 변천사

▲ 한국 크리스마스 씰의 홍보물 변천사

 

‘캐한민국’ 사람, 셔우드 홀...“한국에서 잠들고 싶어”
셔우드 홀은 캐나다인이었지만,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한국의 가난한 결핵 환자와 서민을 돌보고 계몽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캐나다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6년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다가 1928년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문창모 박사와 김병서 선생(크리스마스 씰 위원회 집행위원)이 그의 씰 운동을 물심양면 도왔다. 그렇게 숭례문(남대문)을 도안으로 한 국내 최초 씰이 발행됐고, 이후 1940년까지 9개의 씰이 발행됐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일본 헌병대에 첩자로 몰린 셔우드 홀이 강제 추방되는 일이 발생했다. 씰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그가 추방되자 씰 발행도 중단됐다.


셔우드 홀은 1991년 4월 5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유언에 따라 그는 자신의 부모가 묻힌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같은 해 9월 그의 부인도 셔우드 홀을 따라 그의 옆자리에 묻혔다.

 

 

씰 운동에 대한 오해, “난 불자라서 씰 안 사!”
중단됐던 씰 운동은 광복 후인 1949년, 문창모 박사가 주도해 한국복십자회에서 재개했고, 1952년에는 한국기독의사회에서 씰을 발행했다. 이후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비로소 창립되면서 범국민적인 모금 운동이 펼쳐지게 됐다.

 

미군장병들이 모금한 14,609 달러를 전달하고 있는 주한 미8군 사령관의 모습(1955.1.20), 대한결핵협회 제공


이때부터 씰 운동은 결핵 퇴치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씰 모금이 기독교에서 시작됐다는 오해로 불교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때부터 매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와 학생 등 온 국민이 씰 모금 운동에 참여했고, 초창기에는 미8군 장병이 동참하기도 했다.

 

결핵 발병률 1위, 사망률 3위의 한국, “요즘도 결핵 환자가 있나요?”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크리스마스 전후에 발행하는 증표다. 아직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우편으로 주고받던 시절, 크리스마스 씰을 사기 위해 우체국에서 줄을 서본 경험을 한 번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PC도 아닌 모바일로 소통하는 시대에 크리스마스 씰을 사용할 일이 적어지자 우리는 결핵의 존재도 잊어가는 것 같다. 실제로 그럴까.


대한결핵협회 집계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우리나라 결핵 발병률은 OECD 가입국 중 1위이며, 결핵 사망률 3위다. 결핵으로 인한 국내 사망자 수는 1,356명이며, 신규환자 수도 19,933명에 이른다.

 

한 보건소 관계자는 “결핵 환자를 찾고, 방문해 치료받도록 독려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고 밝혔다. 결핵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만, 완치되기까지는 번거로운 치료과정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 중도 포기 사례도 잦고, 보건소와의 연락이 끊기거나 외면하는 환자도 많다.


목표 모금액의 97.4%를 달성한 2020년에 모인 총 30억 원 중 결핵 환자 발견사업(약 13억 원, 44%)과 대국민 결핵 인식개선(약 13억 원, 44%)에 가장 많은 모금액이 투입되는 이유다.


진화하는 크리스마스 씰, 형태는 달라도 취지는 같다

크리스마스 씰 모금 운동은 이제 우표 옆에 붙이는 형태만은 아니다. 인터넷 발달로 편지나 카드를 우편으로 부치는 일이 줄어들자 씰도 달라져야 했다.

 

 


2007년 이후 전자파 차단스티커 형태부터 다양한 상품(머그잔, 키 링, 모빌, 자석, 디자인 엽서 등)이 씰을 대신했다. 2020년에는 EBS 인기 캐릭터인 ‘펭수’를 활용해 매년 감소하던 모금액이 크게 늘어 목표 대비 97.4%를 달성하기도 했고, 올해는 유재석이 모델로 등장했다.

 

사람이 진화한다고 본질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형태가 달라졌지만 씰 운동의 모금 취지는 120년 전 덴마크의 한 우체부가 씰을 기획하던 그 마음 그대로다.

 

결핵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우리의 관심이 끊어져서는 안 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