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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 기원설의 몇 가지 문제점(3)

- 한국인 최초의 골퍼는 누구일까?

 

  

 

[ 강인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현재 한국 골프계에서 소위 원산해관 골프코스는 1900년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료상의 한계점 때문에 아직 최초 골프코스의 위치를 획정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원산해관 골프코스에서 처음으로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골프를 했거나, 구미포 골프코스나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에서 로스(J.B. Ross) 박사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골프를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상 우리는 외국인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골프를 쳤을까 하는 문제보다는 최초의 한국인 골퍼는 누구일까에 더 주목하게 된다.
이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앞에 놓인 2가지 전제조건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는 ‘원산해관 골프코스’ 또는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가 위치했던 원산항이라는 공간이다
또 한 가지는 골프에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던 로스(J.B. Ross) 박사가 원산에 체류하기 시작한 1901년이라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그 때, 그 장소에서 골프코스 또는 외국인 골퍼들을 접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지금부터 시간을 120여년 전으로 돌려 보자.
지금까지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골프 관련 최초의 신문기사는 1897년 9월 4일자 『독립신문』 3면에 게재된 기사내용이다.

“테니스 잔디코트에서 유행의 변화가 있다. 1897년 녹음의 계절이 시작되면서, 골프가 테니스를 어둡게 만들고 인기 있는 오락으로부터 그것을 추방시킬 것이라고 염려되었다. 크로케가 테니스에 의해 일시적으로 추방된 것처럼 말이다. 테니스 라켓과 볼의 판매라는 활발한 움직임은 소문을 달리 만든다. ...때와 장소 때문에 골프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테니스를 할 수 있다...”1)

당시 신문의 기본 논조는 국민계몽이었고, 이 기사 역시 골프나 크로케와 비교해서 유행을 타고 있던 당시 서구 테니스계의 최신 소식을 보도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기사내용을 통해서 그 당시 영자 독립신문을 구독한 한국내 일부 상류층이 테니스뿐만 아니라 골프 또는 크로케 같은 서구의 스포츠나 오락 등에 관해 정보를 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 1> 독립신문(영문) 1897년 9월 4일자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구한말에 서구의 스포츠는 서구 우월주의적인 프레임을 갖고 개인의 건강과 정신력 뿐만 아니라 대중 계몽까지도 영향력을 가하면서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테니스, 골프 같은 귀족 스포츠는 식민지 상류층의 호기심을 정조준하였다. 19세기 말에 서울에는 이미 외국인을 중심으로 테니스구락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영국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테니스, 골프, 크로케 등을 일상 속에서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인 선교사나 외교관, 사업가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던 일부 한국인들이 서구 스포츠를 접할 기회나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1899년 1월에 윤치호는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에 임명되어 봄부터 원산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3월 7일 원산 감리서 집무실에 도착해서 급한대로 업무를 파악했다.
그가 남긴 그 날 일기에 “이 지역 행정 중심지에는 대략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덕원군은 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덕원군에는 2,075가구가 있다. 하지만 실제 가구 수는 공식 통계의 3배 정도로 추정된다. 덕원군에서 가장 큰 마을은 원산이고, 적어도 2,000가구가 살고 있다. 하지만 공식 통계치는 497가구”라고 적고 있다.2)
그는 캐릭터상으로 서구 문물에 대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듯, 원산지방 관료시절 내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3)
1899년부터 윤치호는 여러 해 동안 원산에 체류하면서 현지 외국인들과 만남을 가졌고 자주 그들을 방문하여 친분을 쌓아 갔다.
1888년 윤치호4)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동부 테네시주 밴더빌스대학과 조지아주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줄곧 현지 감리교회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자주 미국 교회나 기독교 단체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아 방학 때면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 그는 한국에 남감리교 선교회 파견을 요청했으며, 상해로부터 헨드릭스(E.R.Hendrix), 리드(C.F.Reid), 콜리어(C.T.Collyer) 등이 파송되었다.5)
윤치호의 호소로 1896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미국 남감리교는 서울, 개성,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원산에 체류하기 직전까지 서울에서 독립신문 주필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원산에 있던 외국인 공동체를 대략 살펴보면,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들 6명, 게일을 포함한 미국인 4명, 독일인 4명, 영국인 2명, 프랑스인 1명, 덴마크인 1명, 노르웨이인 1명으로 구성되었다.
원산에 거류한 외국인들 가운데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캐나다 선교사들인 듯하다. 1898년에 선교회들 간의 지역분할 협정으로 함경도 지역이 캐나다인들에게 할당되었기 때문에 원산에서 사역한 게일(J.S.Gale) 박사, 하디(R.F.Hardie)박사, 에비슨(O.R.Avison) 박사, 홀(R.S.Hall) 목사, 펜윅(M.C.Fenwick) 목사 등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인이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런 일이었다.6)
1899년 여름에는 독일의 하인리히 왕자가 원산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윤치호는 원산 해관장 오이센(J.F.Oiesen)이 왕자를 위한 저녁 만찬을 마련했을 때도 동석하여 네트워크를 쌓았다. 특히 윤치호는 작은 규모의 원산 외국인 공동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끌어 당기기에 충분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인 중에 빌브로우 씨라는 사람이 있다. 빌브로우 씨는 작년에 펜윅 목사를 통해 갈마반도의 땅 수백 평을 샀다. 그와 그의 위풍당당한 모친은 지난 초여름에 이곳에 왔다. 그 모자는 즉시 새로 산 땅에 기계 공장을 세우고 수도관을 매설하고, 전반적으로 토지를 개선했다. 그들은 물건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10월에 빌브로우 씨 모자는 외국인과의 교류를 완전히 벗어나 새 집으로 이사갔다. ...일본인들은 이 신비로운 영국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빌브로우 씨가 러시아 주재관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가 영국의 비밀계획 사절이라고 암시하는 사람도 있다...”7)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갈마반도는 원산을 끼고 있는 영흥만 남부의 원산만을 이루는 반도이다. 길이 6㎞, 평균 너비 1㎞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위치함으로써 원산만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반도의 몸통부분에 명사십리로 불리는 해변을 갖고 있다.
이같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땅에 영국인 자산가가 저택을 짓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기자 루돌프 차벨(Rudolf Zabel)이 원산을 여행할 때도 이곳 영국인의 ‘작은 왕국’을 둘러보고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원산항을 거대한 만과 차단시켜 주는 길쭉한 땅에 도착했다. 이곳에 영국인의 집이 있었다. 소형 잔교에 서 있던 그는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반도 안쪽에 작은 항구가 있었고 그 주위가 그의 소유지였다. 건물들은 반도 끝을 향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본관 전통 영국식 단층 건물로서 두텁게 쌓아 올린 탑 모양의 현관은 연극의 탑 무대장치를 떠올리게 했다. ...런던의 어느 귀족 저택을 이곳 원산에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바다로 운반해 왔는데, 거기에 사용된 건 주로 이 집의 요트였다. 그 작은 항구에 세 척의 요트가 정박 중이었다. 이 모든 사업의 실질적 책임자인 듯한 노부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우리 작은 왕국’이라고 불렀다. ...부인은 왕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축소판으로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박, 영토, 항구, 백성..., 산비탈에서 풀을 뜯는 가축떼, 사냥터, 고기잡이, 작업장 따위였다. 어떻게 이것들을 전부 여기다 만들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8)

한편 1896년 리드 박사의 부임으로 출발한 미국 남감리교는 1898년 5월 캐나다에서 온 하디 박사를 의료선교사로 임명하면서 개성과 원산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하디 박사는 이전부터 의료선교를 하고 있던 맥길(W.B.McGill) 박사의 요청을 받아 함께 일하였다. 9) 1901년 7월에는 원산에 약방을 개업하였고, 10월에는 원산의 북감리사업을 남감리교 쪽으로 양도하였다.10)
1903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 원산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이기도 한 저다인(J.L.Gerdine)의 초기 한국선교 개척자들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면, 원산에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 가운데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시에 “...한국인들은 그에게 최상의 칭송을 한다. 나는 한 지도적인 한국인 목회자가 설교에서 로스 박사를 가리키며, 여러 해 동안 그를 알아왔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가 기독교인답지 못한 성품을 보인 적은 없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한 기독교 신사이다.”11)
저다인의 기억처럼, 이 사람이 바로 야구, 테니스 그리고 특별히 골프에 조예가 깊었던 로스(J.B. Ross) 박사였던 것이다. 조금 나중 일이긴 하지만, 로스 박사와 터너 목사에 의해서 구입된 갈마반도 외인촌내 골프코스가 만들어진 땅이 12) 공교롭게도 영국인 자산가 빌브로우13)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면 우리의 흥미는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사진 2>  갈마반도 전경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로스 박사는 1901년 11월 원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하디 박사의 조수로 활동하면서 남감리교의 의료선교 사업을 성장시켰고, 1903년부터는 원산구세병원을 단독으로 도맡았다. 이후 구세병원은 1915년에 원산연합기독병원이 설립 될 때까지 로스 박사의 책임하에 의료선교 사업을 성장시켜 나갔다.14)
원산에서 선교하는 일에는 한국인들도 활발히 참여했는데, 1906년 선교 지방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은 정춘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원산상리교회에서 초기 선교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15)
 우리는 원산해관 골프코스에서 최초로 영국인들이 골프를 즐겼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에서 남감리교 로스 박사가 골프를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사실상  자료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외국물 먹기 어렵던 시절에 남다르게 일찍 미국 유학을 했던 윤치호나 구한말 개항장이던 원산에서 기독교 선교에 헌신한 정춘수 전도사 같은 인물들이 골프코스 또는 골프를 접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근거도 부족할는지 모르겠다. 다만 합리적인 추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구한말에 외국인에 의해 원산해관 구내에 골프코스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는 소위 원산해관 골프코스 기원설은 당분간 하나의 가설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원산해관의 주변 조건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골프코스가 위치할만한 땅을 찾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외국인 조계지로 그 경계 범위를 넓혀 생각한다면, 영국인 자산가의 저택이 위치했던 갈마반도 쪽에 골프코스가 위치할만한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한걸음 더 들어가,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사실상 원산에 만들어진 최초의 골프코스는 원산해관 쪽보다는 갈마반도 쪽이 훨씬 더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정황상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를 ‘갈마반도 골프코스 기원설’로 추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강인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참고문헌> 

1) 『독립신문(영문), 189794

2) 윤치호,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4(한국사료총서 번역서 4, 2016)

http://db.history.go.kr/id/sa_028r_0020_0030_0030(accessed 2019. 07. 28

3)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윤치호선집 2), 좌옹윤치호문화서업위원회, 1999, 181

4) 18874월 상해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윤치호는 이미 조선인 최초로 남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다.

5) 이덕주, 윤치호와 한말 기독교 선교, 신학과 세계68, 2010, 148-152

6) 해리 로즈 지음, 최재건 옮김,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v.1,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142

7) 윤치호,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4(한국사료총서 번역서 4, 2016)

  http://db.history.go.kr/id/sa_028r_0020_0040_0010(accessed 2019. 07. 28)

8) 루돌프 차벨 지음, 이상희 옮김,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1904, 살림, 2009, 268-269

9) 이만열, 한말 미국계 의료선교를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 국사관논총3, 1989, 189-190

10) Edited by J.S.Ryang, Southern Methodism in Korea: thirtieth Anniversary, Board of Missions, Korea Annual Conferen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30, p.21

11) 사우어 엮음, 은자의 나라 문에서 : 감리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자료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74

12) 강인구, 한국 골프 기원설의 몇 가지 문제점(2):원산 골프코스에서 누가 공을 쳤을까?, Golf guide, 2019년도 7월호, 137

13) 갈마반도내 빌브로우의 부동산은 일본의 해군용지 수용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토지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14) 이만열, 한말 미국계 의료선교를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 국사관논총3, 1989, 190

15)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