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한국의 프로골퍼...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延德春)
[기획시리즈] 한국의 프로골퍼...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延德春)
  • 김대진
  • 승인 2020.08.27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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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는 한국 프로골프 역사, KPGA는 ‘덕춘상’을 제정해 그를 기린다
-군자리 골프코스의 캐디 보조를 하면서 골프와 인연, 일본 유학해 정식 프로 골퍼가 됐다

 

[기획시리즈] 한국의 프로골퍼

(편집자 주) 우리나라엔 수많은 프로 골퍼들이 있다. 최경주, 박세리, 박인비 등은 누구나 알만한 선수들이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골프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이들의 활약 덕분이다. 1935년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골퍼가 된 연덕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남녀 프로 골퍼 중에서 골프 역사에 남을만한 선수들을 가려 그들의 생애와 전적, 주요 활동 등을 조명해보는 기획시리즈 ‘한국의 프로 골퍼’를 2020년 9월호부터 연재한다. 

연덕춘
연덕춘

 

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延德春)

-그의 생애는 한국 프로골프 역사, KPGA는 ‘덕춘상’을 제정해 그를 기린다
-군자리 골프코스의 캐디 보조를 하면서 골프와 인연, 일본 유학해 정식 프로 골퍼가 됐다

우리나라 골프를 얘기할 때 연덕춘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골퍼이기 때문이다. 
연덕춘은 1916년생으로 한국 골프의 아버지로 불린다. 2004년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 88년 생애는 한국 프로골프 역사다. 한국프로골프협회는 그가 세상을 뜨자 ‘덕춘상’을 제정해 국내 선수 중 평균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시상하는 등 그를 기리고 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뚝섬(지금의 서울 뚝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군자리 골프코스(현재 서울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공원 자리)를 지나다니며 골프를 처음 접했다.
16세 때인 1932년 그는 조카를 만나러 갔다가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가 이곳에서 캐디 마스터(대표 캐디)를 하고 있었는데 조카로부터 캐디 마스터실 보조역을 제안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골프장에서 일하며 어깨 너머로 남들의 플레이를 보며 골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군자리 골프장엔 시라마스라는 일본인 프로 골퍼가 클럽 프로로 일하고 있었다. 시라마스는 회원뿐 아니라 캐디, 캐디 보조,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골프를 가르쳤다. 
시라마스에게 얻은 한 자루의 클럽으로 골프를 시작한 연덕춘은 밤새 연습을 하며 본격적인 프로 골퍼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그는 불과 1년 후 이븐파를 칠 정도의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연덕춘은 골프에 재능이 뛰어났다. 경성골프클럽은 연덕춘을 프로골퍼로 키우기로 했다. 그는 1934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 골프유학을 갔다. 
시라마스가 병이 들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클럽 프로 자리가 비게 됐고, 회원들이 이참에 신임 클럽 프로를 한국인 중에서 뽑자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가와현 후지사와골프클럽에서 본격적으로 골프수업을 받았다. 그를 지도한 사람은 1933년 일본오픈 우승자이며 클럽 헤드프로인 나카무라였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달렸다. 그의 타고난 재능이 더해져 그는 채 1년도 안돼 프로 골퍼가 됐다. 1935년 2월 일본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자격증을 획득한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프로 골퍼, 연덕춘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후 그가 보여준 모든 것은 한국인 1호로 기록된다.

연덕춘
연덕춘

 

-1935년 일본오픈 골프대회에 첫 참가 후 여섯 번째 도전 만에 1941년 대회에서 우승했다.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은 손기정의 금메달 수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크게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연덕춘은 1935년 일본 도쿄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일본오픈에 처음 참가했다. 70명의 참가자 중 아마추어가 28명이었다. 그는 예선 탈락했다. 36홀 168타로 공동 36위. 1타 차 예선 탈락이었다. 경성골프클럽 소속 아마추어 장병량도 출전했으나 역시 179타로 본선에 나가지는 못했다. 연덕춘은 같은 해 일본프로선수권대회에서도 출전했지만 역시 예선 탈락했다. 
그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경성골프클럽의 헤드프로로 활동하면서 군자리골프코스에서 연습했다.
그해 여름 형 덕문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자 고아가 된 조카 둘을 떠맡았다. 가을 스물한 살의 연덕춘은 이난순과 결혼했다. 그보다 한 살 아래였다. 부부는 5남매를 둬 모두 일곱 명의 자식을 부양했다.
그러나 그는 6.25 때 큰 아들을 잃었고 자식처럼 키운 여조카도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일본이 창씨 개명을 강제하하면서 연덕춘은 노부하라가 됐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가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연덕춘은 매년 일본오픈에 도전한 끝에 1941년 대회에서 우승했다. 3타 차로 일본 선수를 꺾은 것이다. 1라운드를 2위로 출발한 그는 2라운드부터 선두로 치고 나왔고 이후 줄곧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4라운드 합계 2오버파 290타였다. 여섯 번의 도전 끝에 이뤄낸 우승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당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태평양전쟁(1941~1945)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린 대회였다.
그가 일본오픈 우승컵을 들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을 거쳐 경성역에 도작하자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본오픈 우승컵이 일본 열도 밖으로 나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다. 대회 다음날인 5월 11일자 동경일일신문에는 연덕춘이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기사가 큰 사진과 함께 실렸다.
또 그가 우승하고 난 한참 후 일본 신문에 ‘톱프로 연덕춘론’이란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연덕춘이 일본오픈에 출전해 모든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5년 전인 1936년에는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적이 있다.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은 손기정의 금메달 수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크게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연덕춘
연덕춘

 

-연덕춘은 태평양전쟁과 해방 정국,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박명출 한장상 김승학 등 한국 골프 1세대를 길러냈다. 
-1956년 연덕춘은 현 월드컵 골프대회 전신인 제4회 캐나다컵에 박명출과 함께 한국 대표로 출전, 대한민국 골프를 세계 무대에 최초로 선보였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제는 당시 한반도에 있던 골프장을 폐쇄해버렸다. 송진 채취와 비행장 활주로 확보가 골프장 폐쇄의 명분이었다. 프로골퍼는 일자리를 잃고 골프장은 순식간에 들과 밭으로 변해버렸다.
전쟁의 여파로 1941년 일본프로골프선수권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대회에서 2위를 했다
연덕춘은 암울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방은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해방정국의 혼돈 속에서 골프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1950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장비 지원을 받아 군자리 골프코스를 복구했다. 그러나 두 달이 못돼 6.25 한국전쟁이 터져 군자리골프코스는 다시 방치되면서 야산으로 변해버렸다. 
연덕춘은 생전 인터뷰에서 군자리골프코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개장 당시 회원은 40여명이었고 1943년 회원 가입금은 500원이었다. 골프코스는 전장 6160야드에 파69였다. 그린은 처음엔 고려잔디였으나 1938년 벤트그래스로 바뀌었다. 이 벤트그래스가 자주 병이 나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골프장은 일본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잔디 병을 예방하려고 했으나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나는 1943년 군자리골프코스가 폐장될 때까지 소속 프로로 활동했다. 당시 골퍼는 신사 중의 신사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에 스타킹, 와이셔츠 상의를 반드시 입어야 했다. 에티켓을 모르면 곧바로 퇴장시킬 정도로 엄격했다. 당시 캐디들은 모두 남자였다.”
군자리 골프코스는 1954년 7월 전장 6750야드, 파72로 재개장했다. 이름도 서울CC로 바뀌었다. 연덕춘은 11년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30대 절정기를 페어웨이 한번 밟지 못하는 불운과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박명출 한장상 김승학 등 한국 골프 1세대를 길러낸다. 
1956년 연덕춘은 현 월드컵 골프대회 전신인 제4회 캐나다컵에 고 박명출(1929~2009)과 함께 한국 대표로 출전, 대한민국 골프를 세계 무대에 최초로 선보였다.
월드컵 골프대회는 1953년 시작돼 초창기 대회는 1968년 월드컵으로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 캐나다컵 국제골프선수권대회로 불렸다. 이 대회에 한국은 1956년 처음 출전했다.
대회를 주관했던 국제골프협회가 초청장을 보내온 것은 일본에서 연덕춘이 활약한 덕분이었다.
당시 국내엔 공인된 프로 골퍼가 연덕춘 한 명 뿐이었다. 월드컵은 1개국에서 2명의 선수가 짝을 이뤄 겨루는 방식이라 서울CC에서 파트너 선발전을 치렀다. 3명이 벌인 선발전에서 박명출이 뽑힌 것이다.
그해 7월 잉글랜드 웬트워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국은 단체전에서 29개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연덕춘은 개인전에서도 24위를 했다. KPGA 창립 전인데다 프로 골프대회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던 나라의 선수들이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낸 성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은 1971년 9월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 장상과 김승학이 5위를 차지했다. 2002년 월드컵에선 최경주와 허석호가 3위를 차지해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렸다.

일본오픈 선수권대회 우승트로피
일본오픈 선수권대회 우승트로피

 

-연덕춘은 1958년 6월 처음으로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서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1963년 ‘프로골프회’를 만들었고 1968년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 때는 상무 겸 징계위원장을 맡았다. 4년 뒤인 1972년에는 제2대회 KPGA 회장에 올라 협회를 이끌었다.

연덕춘이 국내 골프대회에 참가한 것은 1958년. 6월 12일부터 서울CC에서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나흘간 72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치러졌다. 당시엔 한국프로골프협회가 창설되기 전이라 서울CC가 대회를 주관했다. 서울CC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를 1954년 복구해 이름을 바꿔 단 곳이었다.
프로 3명과 프로가 되려고 수업 중인 ‘양성자’ 신분 14명 등 총 17명이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연덕춘은 4라운드 합계 18오버파 306타를 기록하며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2위(322타) 고 김복만(1936~1989)과는 16타나 차이가 났다. 
한국오픈은 석 달 뒤인 9월 11일부터 나흘간 같은 코스에서 개최됐다. 한국오픈은 프로와 아마추어 골퍼들이 함께 경기를 펼쳐 골프 활성화에 모태가 됐다. 아마추어 골프 최강자를 가리면서 프로 골퍼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군무원이던 무어가 초대 챔피언이 됐다. 연덕춘은 5위에 그쳤다.
연덕춘은 1963년 ‘프로골프회’를 만들었다. 프로 골퍼의 친목 단체였다. 회칙에 프로 골퍼 자격을 인정하는 절차와 프로 골퍼가 지켜야 할 덕목 등이 들어있었다. 프로골프협회나 다름이 없었다.
현재의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설은 5년이 지난 뒤 성사됐다. 프로 자격 부여와 프로 골퍼의 해외 경기 참가 등 온갖 업무를 맡은 서울CC가 1966년 대한골프협회의 전신인 한국골프협회 창립에 나서면서 프로 골퍼의 뒷바라지에만 매달리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1968년 KPGA가 창립되면서 연덕춘은 상무 겸 징계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이사장은 허정구, 부이사장은 박용학이었다. 창립회원으론 회원 번호 1번인 연덕춘을 비롯해 신봉식, 박명출, 배용산, 김복만, 한장상, 한성재, 김성윤, 홍덕산, 이일안, 문기수, 조태운(회원번호 1~12번) 등 12명이었다. 
연덕춘은 4년 뒤인 1972년 2대 KPGA 회장에 올랐다. 협회는 프로 골퍼들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었다. 박명출과 배용산이 부회장에 선임돼 회장단 모두 프로 골퍼들이 맡았다. 연덕춘 이후에도 1970년대에는 프로 골퍼 출신 회장들이 연이어 맡으면서 협회를 키워갔다. 3, 4대는 박명출, 5대는 김복만, 6대는 한 장상, 7대는 이일안, 8대는 홍덕산이 회장을 맡았다. 이들 모두 연덕춘에게 직접 골프 지도를 받았다. 
그가 키워낸 제자 중 한장상이 19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했다. 연덕춘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31년만이었다. 

[김대진 편집국장 사진: KGA, KPGA]

 

연덕춘 골프채(독립기념관 소장)
연덕춘 골프채(독립기념관 소장)

 

 [연덕춘 골프채]

한국 최초의 프로 골프선수 연덕춘이 사용한 골프채 4점으로, 2012년 8월 13일 등록문화재 제500호로 지정됐다.
현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연덕춘이 사용한 골프채로, 1930년대에 제작된 영국의 잭 화이트(Jack White) 제품이다. 드라이버, 롱아이언, 쇼트아이언, 퍼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 골프채의 샤프트(shaft; 막대 부분)는 목재로 만들었고, 그립(grip; 손잡이) 부분은 가죽으로 감겨져 있다. 
헤드(head; 공을 타격하는 타구면)의 경우 드라이버는 서로 다른 성분의 금속판 두 개를 뒷면에 덧댄 목재로 되어 있으며, 롱·쇼트 아이언과 퍼터는 금속(철)으로 만들어졌다. 
샤프트 길이는 드라이버 101cm, 나머지 골프채는 각각 81cm, 83.5cm, 87.5cm이다. 샤프트의 단면 두께는 모두 2cm이다. 헤드 부분에 녹이 약간 슬고, 나무에도 손상이 조금 있으며 그립의 가죽도 접합이 풀렸지만 전체적으로 보관 상태는 좋은 편이다.
골프채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고, 한국 최초의 프로 골퍼인 연덕춘이 사용한 골프채라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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