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회복"과 "취약계층 보호."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가장 강조하고 있는 국정 철학이다. 어려운 국민을 먼저 살피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서민의 삶을 지키겠다는 것이 정부가 제시한 방향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역시 '국민 중심 서비스'와 '건강한 삶, 건강한 국민'을 운영 철학으로 내세우며 국민의 건강권을 책임지는 대표적인 사회보험 기관임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국민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건강보험 행정은 정부의 국정 철학과 공단이 내세우는 가치와 적지 않은 거리감을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가 확보한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와 지사 담당자의 상담 녹취는 사회보험이 지향하는 공공성과 실제 행정 집행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취재는 보험료 체납으로 예금채권이 압류된 한 시민의 제보에서 시작됐다. 그는 보험료 납부를 거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건강 악화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험료를 제때 납부하지 못했고, 통장 압류 사실을 확인한 뒤 공단에 해결 방안을 문의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공단의 모습은 상담과 구제보다 징수와 압류가 먼저 작동하는 기관이었다는 것이 제보의 핵심이다.
통장이 압류되자 금융거래는 사실상 멈췄다. 자동이체와 각종 결제는 물론 생활비 사용에도 차질이 발생했고, 정부 지원금 수령에도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공단은 체납 보험료 징수를 위한 적법한 절차라고 설명한다.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을 위해 체납 관리는 분명 필요한 업무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험료를 내지 못한 국민이 압류로 인해 다시 경제활동의 제약을 받는 구조가 과연 사회보험이 지향해야 할 모습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큰 논란은 상담 과정에서 드러났다. 민원인은 여러 차례 "보험료를 안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낼 형편이 안 된다"며 분할 납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상담 과정에서 제시된 압류 해제 기준은 일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완납이 원칙이라는 설명이 나왔고, 이어 일정 비율을 납부하면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었다. 이후에는 일부 금액 납부 기준이 제시됐으며, 마지막에는 "담당자 재량"이라는 답변까지 등장했다.
국민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압류 해제 기준이 법령에 근거한 것인지, 내부 규정인지, 담당자의 재량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의 기본은 예측 가능성과 형평성이다.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같은 기준을 적용받아야 하며, 그 기준은 국민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상담 내용만 놓고 보면 기준과 재량의 경계가 모호하게 비쳤다. 이러한 혼선은 행정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상담 과정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장면도 있었다. 민원인이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상담사는 국민신문고를 통한 민원 제기를 안내했다. 상담사의 권한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서는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전화를 걸었는데 결국 다른 기관으로 안내받는 경험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공공기관의 상담은 단순한 민원 안내가 아니다. 국민과 행정이 가장 먼저 만나는 접점이며,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상담은 공단이 내세우는 '국민 중심 서비스'가 현장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금융기관도, 채권추심회사도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고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회보험이다. 보험료를 징수하는 일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기능이지만, 그것이 기관의 존재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체납 보험료를 관리하는 일은 공단의 중요한 책무다. 그러나 징수의 필요성과 징수 방식의 적절성은 구분돼야 한다. 체납이 발생하면 독촉과 압류가 먼저 이뤄지고, 이후에야 분납이나 구제 방안을 검토하는 현재의 구조가 사회보험의 철학과 부합하는지는 냉정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생계형 체납자에 대한 접근은 더욱 세심해야 한다. 고의적인 체납자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납부하지 못하는 국민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과연 공정한 행정인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국민에게 가장 먼저 강한 행정력이 작동하고 있다면 사회보험의 존재 이유 역시 다시 질문받을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민생 회복'과 '취약계층 보호'를 국정의 최우선 가치로 제시해 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역시 '국민 중심 서비스'를 운영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책의 가치는 선언이 아니라 국민이 현장에서 체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생계가 어려운 국민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는 것이 상담과 회복이 아니라 압류와 독촉이라면, 정부의 국정 철학과 공단의 행정 사이에는 분명 되짚어봐야 할 간극이 존재한다.
이번 논란은 한 체납자의 사연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민을 어떤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보험료를 걷는 일은 사회보험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사회보험의 존재 이유는 가장 어려운 순간 국민의 삶을 지키는 데 있다. 국민이 건강보험공단을 복지기관이 아닌 채권추심회사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한 기관의 이미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보험에 대한 국민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징수 실적이 아니라 공공성의 회복이며, 그것이야말로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민생 회복을 현장에서 증명하는 첫걸음이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