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강매화 기자 | 삼성전자가 프랑스 인공지능(AI) 기업 미스트랄 AI와 손잡고 ‘AI로 반도체를 만드는 시대’를 앞당긴다. 지금까지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에 필요한 반도체를 공급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AI를 반도체 설계와 제조공정 안으로 직접 끌어들여 개발 기간과 수율, 생산성을 동시에 잡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와 미스트랄 AI는 8일(현지시간) 한·프랑스 정상회담을 계기로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반도체 설계·제조에 특화된 자체 AI 모델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외교를 계기로 한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과 프랑스의 AI 기술력이 결합하면서 기업 간 협력을 넘어 한·프랑스 첨단산업 협력의 상징적인 프로젝트로도 의미가 커졌다.
협력의 중심에는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이 축적한 방대한 반도체 기술·제조 데이터가 있다. 여기에 미스트랄의 고효율 대형언어모델(LLM)과 기업용 AI 기술을 결합해 삼성 반도체 업무에 최적화된 AI를 구축한다.
삼성전자는 미스트랄의 대표 LLM인 ‘미스트랄 라지’를 비롯한 AI 솔루션을 활용해 자체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설계와 제조 현장의 데이터 분석, 결함 예측, 공정 최적화 등에 단계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단순히 생성형 AI를 업무에 도입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가 겨냥하는 것은 AI가 실제 제조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AI 팩토리’다.
반도체 공정은 미세화될수록 관리해야 할 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나의 웨이퍼가 수백 단계의 공정을 거치는 동안 장비 상태와 소재, 온도, 압력 등 수많은 요인이 수율을 좌우한다. 특히 3나노에서 2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으로 경쟁 무대가 이동하면서 사람이 경험과 개별 분석만으로 모든 변수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AI가 주목받는 이유다.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사람이 찾기 어려운 변수 간 상관관계를 찾아내고 이상 징후와 결함 가능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불량률을 낮추고 수율을 끌어올릴 여지가 커진다.
결국 초미세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가 ‘누가 더 작은 선폭을 구현하느냐’를 넘어 ‘누가 AI를 제조 현장에 더 빠르고 정교하게 심느냐’로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핵심 제조 데이터 밖으로 안 나간다…‘소버린 AI’ 승부수
이번 협력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보안이다.
반도체 제조기업이 외부 AI 서비스를 활용하려면 설계와 공정 데이터를 외부 클라우드로 보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도체의 수율과 공정 조건, 장비 운영 데이터가 기업 경쟁력 그 자체라는 점을 감안하면 AI 활용을 위해 핵심 데이터를 외부에 맡기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
삼성전자와 미스트랄은 이를 ‘온프레미스(On-Premises)’ 방식으로 풀기로 했다. AI 모델을 외부 클라우드가 아닌 삼성전자 자체 서버와 데이터센터 등 내부 인프라에서 운영하는 구조다.
삼성은 반도체 관련 데이터를 외부로 이전하지 않은 채 AI를 활용할 수 있어 제조 노하우와 국가 핵심기술을 보호하면서 AI 도입을 확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데이터와 모델, 컴퓨팅 환경에 대한 기업의 통제권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소버린 AI’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스트랄이 금융과 제조, 에너지 등 높은 수준의 정보보안이 요구되는 산업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3년 프랑스에서 출범한 미스트랄은 구글 딥마인드와 메타 출신 연구진을 중심으로 설립돼 미국 빅테크 중심의 생성형 AI 시장에 도전하는 유럽 대표 AI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 미스트랄 투자도 주도…‘반도체+AI’ 이해관계 맞물렸다
양사의 결합은 기술협력을 넘어 자본동맹으로도 이어졌다.
미스트랄 AI는 이번 시리즈 D 투자 라운드를 통해 총 30억 유로를 조달했다. 삼성전자가 투자를 주도했고 유럽계 투자자 등이 함께 참여했다. 다만 30억 유로는 전체 투자 라운드 규모로, 삼성전자의 개별 투자액과 확보 지분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투자로 미스트랄의 기업가치는 210억 유로 이상으로 평가됐다. 출범 약 3년 만에 유럽을 대표하는 AI 기업 가운데 하나로 몸값을 끌어올린 것이다.
삼성 입장에서도 미스트랄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AI 시장이 커질수록 데이터센터와 AI 서버 투자가 늘고 HBM을 비롯한 첨단 메모리와 반도체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미스트랄의 AI를 삼성 반도체 공정에 적용하면 자체 제조 경쟁력까지 높일 수 있다.
‘AI용 반도체를 공급하고, AI로 다시 반도체를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노리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협력 범위를 메모리와 파운드리, 로직 등 DS부문 전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AI 모델뿐 아니라 반도체 업무에 최적화된 AI 플랫폼과 운영체계도 공동 구축한다. 장기적으로는 삼성 내부를 넘어 고객사와 협력사까지 연결하는 AI 기반 반도체 생태계 구축도 추진한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은 “반도체 설계와 제조의 복잡성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대규모 데이터를 안전하고 정교하게 활용할 수 있는 AI 역량이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미스트랄과 반도체 산업에 특화된 AI 모델과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르튀르 멘쉬 미스트랄 AI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도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통해 반도체 설계·제조와 글로벌 AI 가치사슬 전반의 발전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삼성과 미스트랄의 이번 동맹은 결국 AI 산업 경쟁의 무대가 모델 자체에서 제조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를 넘어 기업의 핵심 데이터를 지키면서 실제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적용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로서는 HBM과 파운드리 등 AI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동시에 ‘AI를 활용한 제조 경쟁력’이라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2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에서 수율과 생산성이 기업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미스트랄과 구축할 ‘AI 팩토리’가 삼성 반도체의 새로운 초격차 수단이 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