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강매화 기자 | 미국에서 시작된 국채금리 충격이 유럽과 일본으로 번지면서 세계 채권시장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장중 5.34%까지 치솟아 24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한 데 이어 영국 30년물 금리는 6%를 돌파했고 프랑스와 일본의 국채금리도 수십 년 만의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각국의 통화정책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이다. 중동발 고유가가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하는 가운데 주요국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국채 공급 증가에 대한 우려까지 겹치면서 투자자들이 장기채를 보유하는 대가로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세계 자산가격의 기준이 되는 국채금리가 동시에 상승하면서 가계와 기업은 물론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까지 높아지는 ‘글로벌 고금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1일(현지시간) 장중 5.34%까지 올라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3분기에만 약 90bp(1bp=0.01%포인트) 상승하며 21세기 들어 가장 큰 분기 상승폭을 나타냈다. 30년물 금리도 장중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을 다시 갈아치웠다.
다만 장 후반에는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면서 금리가 일부 되돌림을 보였다. 10년물 금리는 5.237% 수준으로 내려왔고 30년물도 5.61% 안팎으로 상승폭을 줄였다. 하루의 등락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장기금리 자체가 20여 년 만의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다.
◇ 영국 30년물 6% 돌파…유럽·일본까지 동반 충격
채권 매도세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영국 30년물 국채금리는 장중 6.029%까지 올라 1998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10년물 역시 5.510%로 2007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상승했다. 중동 사태에 따른 에너지 가격 부담에 재정건전성 우려까지 겹치면서 영국의 국채금리 상승폭은 상당수 유럽 국가를 웃돌았다.
프랑스 10년물 국채금리도 5%에 근접하며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정부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진 가운데 새 예산안을 둘러싼 불확실성까지 채권시장에 반영되고 있다. 일본 역시 장기 국채금리가 다년간 최고 수준에서 움직이면서 그동안 글로벌 저금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일본 채권시장마저 세계적인 금리 상승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요국 국채금리가 동시에 오르는 것은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국채금리는 정부가 돈을 빌리는 비용인 동시에 주택담보대출과 기업대출, 회사채 등 민간 금융상품 금리의 기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장기금리 상승이 지속될수록 정부의 이자 부담뿐 아니라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까지 위축될 가능성이 커진다.
◇ 고유가에 국가부채까지…채권시장이 두려워하는 것
최근 국채 투매의 직접적인 배경 가운데 하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인플레이션 우려다. 미국의 9월 제조업 지표에서는 투입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며 비용 압력이 지속되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났다. 중동 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중앙은행이 예상보다 오랫동안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경계도 채권 매도를 부추기고 있다.
여기에 국가부채 문제가 겹쳤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40조달러를 넘어섰고 독일을 제외한 주요 7개국(G7)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100% 안팎 또는 그 이상에 올라 있다. 정부가 늘어난 재정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면 시장에서는 공급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과 금리 상승 압력이 발생한다.
결국 최근의 금리 상승은 ‘연준이 기준금리를 몇 번 더 올릴 것인가’라는 문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인플레이션뿐 아니라 정부부채와 재정적자, 국채 공급 증가에 대한 위험까지 장기금리에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 중국 연료수출 중단…브렌트유 102달러
에너지시장에서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중국 정유업체들이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한 지역에 대한 석유제품 수출을 중단하면서 이미 공급이 빠듯한 글로벌 연료시장의 긴장감이 더 높아졌다. 러시아가 10월까지 경유 수출을 중단한 상황에서 중국까지 공급을 줄이자 경유를 비롯한 석유제품 부족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국제유가는 즉각 반응했다. 1일 브렌트유 12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4.37% 오른 배럴당 102.31달러에 마감했고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2.71% 상승한 92.87달러를 기록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긴장과 중국의 연료수출 중단이 동시에 공급 불안을 자극한 결과다.
고유가가 장기화하면 채권시장에는 다시 부담이 된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운송비와 생산비를 거쳐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유럽중앙은행(ECB), 영국 중앙은행 등 주요 중앙은행이 금리를 빠르게 낮추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유가와 국채금리가 서로를 자극하는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AI 호황에도 높아지는 ‘돈의 가격’
흥미로운 점은 세계 제조업 경기가 완전히 꺾인 상황에서 국채금리가 급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9월 유로존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2.9로 2022년 5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고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 주요 제조업 국가에서도 AI와 반도체 수요를 중심으로 생산과 수출이 개선됐다.
AI 투자 확대가 세계 제조업의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동시에 막대한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발전설비, 전력망 투자를 위한 자금 수요도 늘리고 있다. 장기금리 상승이 지속되면 지금까지 AI 산업을 떠받쳐온 대규모 설비투자의 자금조달 비용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글로벌 채권시장의 충격은 금융시장 내부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국채금리가 오르면 세계 금융시장의 기준금리가 함께 높아지고, 이는 기업의 설비투자와 주택시장, 정부 재정, 신흥국 자금흐름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현재 글로벌 채권시장이 여전히 질서 있게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급격한 금리 상승에도 시장 유동성이 마비되거나 금융시스템 자체가 흔들리는 단계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과 금리 상승의 경제적 충격이 작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미국에서 영국과 프랑스, 일본으로 번진 장기금리 상승이 계속될 경우 정부는 더 비싼 이자를 부담해야 하고 기업은 더 높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가계 역시 주택담보대출과 자동차대출 등에서 고금리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된다.
세계 금융시장의 질문도 달라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관심이 ‘연준이 언제까지 금리를 올릴 것인가’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기준금리와 별개로 장기금리가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10년물 5.34%, 영국 30년물 6%.
두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채권가격 하락이 아니다. 수십 년간 세계 경제를 떠받쳤던 값싼 자금의 시대가 끝난 뒤 ‘돈의 가격’이 어디에서 새 균형을 찾을지를 놓고 세계 금융시장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