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정길종 기자 |한 발, 또 한 발. 조용히 숲길을 걸을수록 마음의 속도도 느려진다. 제주 동부 비자림로에서 시작된 길은 이내 울창한 숲으로 나를 이끈다.

이곳은 제주 사려니숲길. 이름부터 신비로운 ‘사려니(신성한 숲)’는 그 이름처럼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숲길 입구에 들어서자, 맑고 촉촉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온다. 눈앞엔 삼나무, 편백, 졸참나무, 서어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빽빽하게 줄지어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든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 내 휴대전화 알림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이 펼쳐졌다.

“요즘은 이런 데 와야 좀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요.”
혼자 걷고 있던 40대 여성 방문객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서울에서 왔다는 그는 “출근길 지하철과 회의실, 커피숍만 오가다가, 이 조용한 숲에 오니 너무나 큰 위로를 받는다”며 연신 ‘힐링’을 말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런 ‘숲캉스(숲+바캉스)’가 MZ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진정한 휴식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사려니숲길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인 제주 ‘곶자왈’ 지대에 위치해 있다. 곶자왈은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바위 틈 사이로 다양한 식생이 공존하는 독특한 생태계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천연 자연 유산이다.

이 길은 약 10km,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진다. 완만한 경사와 잘 정비된 탐방로 덕분에 등산 장비 없이도 누구나 가볍게 걸을 수 있다.
가을의 사려니숲길은 특히 더 특별하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초록빛 나무들 사이로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숲 바닥에 아름다운 패턴을 그린다. 그 순간, 걷는 이들의 발길이 멈추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낸다. 사진이 아니라 이 순간을 꼭 담아두고 싶어서다.
숲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사람들의 말소리는 줄어들고, 모두가 고요한 마음으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또 누군가는 오름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 끝없이 이어진 숲길을 바라본다. 그 어떤 말보다도 진한 위로가 이곳엔 있다.
사려니숲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삶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쉼터’이고,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성찰의 공간'이다. 숲은 말이 없지만, 숲에 들어온 이들은 스스로 답을 찾고 나간다.
내려오는 길. 아까 지나쳤던 삼나무 사이를 다시 지나며 문득 생각이 든다. “이곳에선 걷기만 해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