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문채형 기자 | 2018년, 대한민국은 ‘김용균’이라는 이름 앞에 멈춰 섰다. 태안화력의 어두운 컨베이어 벨트 아래에서 스물넷 청년이 목숨을 잃은 그날, 우리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산업안전의 근본부터 바꾸자고 약속했다. 그 다짐은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됐고, 많은 이들이 달라질 내일을 기대했다.

그러나 2025년 6월의 태안화력은 6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번엔 50대 하청 노동자 김충현 씨가 밀링머신에 끼어 숨졌다. 작업 공간엔 여전히 혼자 일하는 노동자가 있었고, 비상정지 장치는 있었지만 작동시킬 동료는 없었다. 현장은 여전히 ‘죽음이 기다리는 구조’ 그대로였다.
사고 직후 한전KPS(사장 김홍연)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는 더욱 충격적이다. “발전설비와 관련 없는 공작기계에서 발생한 사고이며, 파급 영향은 없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문장이 ‘설비에 영향 없음’이라는 사실은, 이 조직이 사람을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공기업이라는 사실은 이 비극을 더 끔찍하게 만든다.
김 씨는 한전KPS의 2차 하청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정비업무는 하청에, 하청은 또다시 재하청에. 다단계 고용 구조는 책임을 흩트리고, 관리의 구멍을 만들며, 결국 가장 아래에 있는 노동자를 위험으로 내몬다. 안전관리자 한 명이 수십 명의 작업자를 감당해야 하는 구조는, 어느 날 누구에게든 재난이 닥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고 직후 한전KPS가 내놓은 설명자료엔 “금일 작업오더에 포함되지 않은 작업”이라는 문구도 담겼다. 이는 자칫 고인의 책임을 부각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실제 의도와 무관하게, 최소한의 책임의식이 있다면 감히 꺼낼 수 없는 문장이다. 사고를 개인의 일탈로 돌리고 조직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야말로, 중대재해를 반복시키는 가장 위험한 습관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법은 있으되, 현장은 그 이름만 빌려왔다. 도급 금지 업종은 여전히 좁고, 원청의 책임은 실질보다 선언에 그친다. 김용균 사망 당시 서부발전 대표였던 김병숙 전 사장이 대법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위험의 외주화를 ‘합법적 경영 전략’으로 용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재명 정부는 이 죽음을 단지 산업안전의 실패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반복되는 죽음은 곧 정책의 실패다. ‘노동존중’을 국정 철학으로 내세운 정부라면, 지금이야말로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말해야 할 때다.
정부는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해 공공부문 외주화 구조에 메스를 대야 한다. 공기업이 사적 이윤의 논리로 노동자의 안전을 외면하고, 그 피해를 하청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그 어떤 법도 무력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제 역할을 하려면, 공공기관부터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
한전KPS는 이 사건을 “유감”이라는 한 줄 논평으로 덮을 수 없다. 김용균 사망 이후 이 조직은 무엇도 바꾸지 않았다. 고용 구조도, 인력 배치도, 안전 문화도 그대로다. 바뀐 것이 있다면, 오직 ‘책임 회피 기술’뿐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또 한 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 물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우리는 또 다른 김충현을 막을 수 있는가. 한전KPS 역시 답해야 한다. 이 조직은 누구를 위한 공기업인가.
‘설비 이상 없음’이라는 문장 대신, “우리가 책임지겠다. 반드시 바꾸겠다”는 사과와 다짐이 필요한 때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