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김정훈 기자 | 해남 들녘에서 자란 가루쌀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수확 이후 창고에 머무를지, 가공 공정을 거쳐 새로운 상품으로 다시 태어날지. 그 갈림길에 대한 질문이 군의회 본회의장에서 던져졌다.
해남군의회 이성옥 의장은 최근 열린 제349회 해남군의회 임시회 제5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가루쌀 산업 전반에 대한 재점검 필요성을 제기했다. 생산 중심 정책 흐름에서 벗어나, 가공·유통·소비까지 잇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의장은 먼저 숫자로 현장을 풀어냈다. 현재 해남에서는 900여 농가가 약 1,300ha 면적에서 가루쌀을 재배하고 있다. 전국 최대 수준이다. 웬만한 시·군 단위를 훌쩍 넘는 규모다. 쌀 수급 정책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온 해남의 선택이 수치로 드러난 셈이다.
쌀 소비 감소와 가격 변동이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가루쌀은 대안 작물로 부상해 왔다. 가공 적성이 뛰어나고 밀가루 대체 수요까지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지원도 이어졌다. 해남은 이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올라탄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 의장은 “관건은 수확 이후”라고 선을 그었다. 생산 규모는 전국 최고 수준에 도달했지만, 가공과 유통, 소비로 이어지는 체계는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인근 지역 사례도 자연스럽게 언급됐다. 해당 지역의 한 가루쌀 생산 법인은 250ha 이상을 재배하면서 원물 납품에 머물지 않았다. 가공 시설을 먼저 갖추고, 브랜드를 만들었다. 여기에 베이커리 카페까지 더해 관광과 소비를 함께 묶었다. 지금은 70여 종이 넘는 제품을 선보이며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의장은 “이 사례는 가루쌀이 대체 작물에 머무르지 않고, 농업과 관광, 식품 산업을 함께 엮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증명한 장면”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해남의 현실은 아직 산업화 문턱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대규모 생산 기반을 갖췄음에도, 상당수 농가는 여전히 판로와 수익 구조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다. 수확 이후 원물 중심 유통이 반복되면서 부가가치가 지역에 충분히 남지 않는 구조도 이어지고 있다.
이 의장은 “지금처럼 재배 중심 정책에 머물면 가루쌀은 또 하나의 과잉 생산 품목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산업으로 키울 준비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어 구체적인 해법도 제시했다. ‘땅끝해남 가루쌀’과 같은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 군이 중심이 되는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브랜드는 이름표가 아니라, 품질 관리와 유통 전략을 함께 묶는 기준선이라는 설명이다.
활용 폭을 넓히는 전략도 함께 언급했다. 가정식과 이유식, 간편식, 베이커리 제품은 물론 반려동물 식품까지 영역을 확장해 소비 기반을 키우고, 이를 뒷받침할 레시피 개발과 홍보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지역 연계 방안도 과제로 꼽았다. 외식업체와 제과점, 학교·공공급식시설과 협력해 해남산 가루쌀 사용 비중을 높이고,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는 연결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구마·전복 등 해남 대표 농수산물과 결합한 특화 상품 개발도 제안했다. 고구마빵, 전복 파스타 등 지역 색깔을 살린 상품을 통해 차별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 의장은 가루쌀 공공비축 수매 정책의 향방에도 주목했다. 올해 정책이 단기 수급 조절에 머물지, 장기 산업 육성으로 이어질지는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정책적 뒷받침이 약해지면 재배 면적은 다시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는 벼 재배 확대와 쌀값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가루쌀 경쟁력은 해남 전체 쌀 산업을 지키는 문제”라고 말했다.
결국 관건은 방향과 속도다. 생산 기반은 이미 충분히 마련됐다. 이제는 행정과 의회가 역할을 나누고, 민간과 손잡아 산업 구조를 설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의장은 “해남은 이미 가루쌀 1번지로 불릴 만한 조건을 갖췄다”며 “이 이름에 걸맞은 정책 깊이와 산업 체계를 갖춰 군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가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해남군은 가루쌀 생산 기반을 토대로 가공·유통·소비를 연계한 산업 구조 구축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군의회와 집행부가 제시된 과제들을 정책에 어떻게 녹여낼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