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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수로 만나는 세계명화] 로트레크 〈물랭루즈의 춤〉

 

로트레크는 누구인가

1864년 프랑스 알비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1901년 37세로 프랑스 말로메에서 사망했다.

 

14세, 15세에 각각의 사고로 다리가 골절되어 하반신을 못 쓰게 되면서 다리의 성장이 멈춰서 키가 작았고, 이로 인해 그는 수많은 풍자만화의 소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자산가인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공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8세에 파리에서 보나, 고르몬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밤의 보헤미안, 로트레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귀족 사회의 위선과 허세를 싫어했다. 21세에 몽마르트르에 머무르며 ‘물랭루즈’와 같은 카페와 카바레, 사창가에 출입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곧 유명해졌다.

 

‘밤의 보헤미안’이라 불렸던 그는 세속적인 주제를 즐겨 표현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듯하지만, 밤의 저속한 일상과 화려함, 흥겨움과 웃음 속에 가려진 비애를 보여주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물랭루즈의 춤〉 등 파리의 풍속과 애환을 담은 작품을 민첩하고 정확하게 그렸으며, 사회적 약자였던 광대나 매춘부를 즐겨 그렸다. 석판화에도 능했다.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1891년 27세 이후에는 자주 가던 밤업소의 포스터를 많이 그렸는데, 상업적인 포스터를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신체적 이유에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밤업소의 여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녀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쉬잔 발라동과 다른 화가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37세 짧은 생애

그는 자신만의 화풍으로 인정받았으나 지나친 술과 매독으로 인한 병으로 35세에 입원했고, 그 병이 재발한 1901년, 37세의 나이로 남프랑스에 살던 모친에게로 돌아가 짧은 생애를 마쳤다.

1922년 로트레크의 모친은 아들의 모든 작품을 알비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가장 성공적인 대형작품

이 작품 〈물랭루즈의 춤〉은 그가 그린 대형작품 중 세 번째이자, 가장 성공적인 대형작품으로 물랭루즈의 지배인이었던 조셉 올레르가 구입해 물랭루즈의 현관에 걸었던 작품이다.

 

당시 나이트클럽으로 유명했던 물랭루즈의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순간을 묘사했다. 당시 유명한 춤꾼으로 뼈가 없다는 뜻의 ‘Boneless’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가 한 여인에게 ‘캉캉’ 춤을 가르치기 위해 플로어에 나서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인물들의 움직임을 빠르게 포착하여 그만의 묘사력과 자유로운 붓질로 만들어낸 선들로 표현했다.

 

 

물랭루즈를 찾은 예이츠까지 담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화류계 멤버들로 밤에만 활동하는 작가와 매춘부들이 대부분이다. 오른쪽 배경의 네 명의 남자는 그의 친구인 가우치, 바르네이, 세스코, 귀베르라고 전해진다.

 

 

특히 바에 기댄 흰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는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라고 한다. 그림의 가운데 배치된 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추정은 많으나 확실치는 않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배경에 ‘뼈가 없는 듯이 춤 잘 추는 발렌타인이 초보자를 가르치다’라고 로트레크가 직접 연필로 썼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