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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토리> 최다승의 사나이, 샘 스니드

지이코노미 박진권 기자 | 샘 스니드는 PGA 투어 82승을 포함하여 프로대회 165승을 기록한 최다승의 사나이다. 24세에 PGA 첫 승을 올리고 52세에 마지막 우승을 따내며 PGA 최고령 우승자가 됐다. 메이저 대회 7승을 하면서도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지 못한 불운의 선수기도 하다. US Open에서 2위만 3번 하면서 오픈 징크스로 유명해진 선수이며, 벤 호건의 전성기 시절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샘 스니드 Sam Snead 1912 ~ 2002

 

주요 기록

 

메이저 7승

마스터스 : 1949, 1952, 1954

British Open : 1946

PGA 챔피언십 : 1942, 1949, 1951

PGA 투어 : 82승

PGA 투어 상금왕 : 3회

바든 트로피 : 4회

라이더 컵 미국 대표 : 9회

라이더 컵 캡틴 : 3회

 

위대한 선수의 탄생

스니드 가족들은 조상 때부터 타고난 거인들이었으며 힘이 장사였다. 샘은 가족에 비해 큰 체격은 아니었지만, 180cm에 85kg을 건강하게 유지했다. 키에 비해 긴 팔은 골프 스윙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척추뼈가 한 개 더 많았다. X-ray로 촬영한 사진을 본 의사는 샘이 골프 스윙을 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중요한 대회 도중 갑자기 찾아온 허리 통증으로 플레이를 중단하기도 했다.

 

골프에 대한 샘의 첫 기억은 7~8세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샘은 자동차 안테나 같은 막대에 주워 온 헤드를 달아서 공이든 돌멩이든 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스윙으로 쳤다. 골프 스윙에서 힘보다 리듬과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의 느낌은 그가 평생 지켜온 부드러운 스윙의 기초였다. 샘은 언제나 골프를 좋아했지만, 골프장에서 연습할 수 없어 목장의 긴 풀 위에서 돌멩이를 두고 멀리 치는 연습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홈스테드 호텔 골프장의 프로 샵에 취직했다. 프로 골퍼의 인생을 시작했다. 샘은 하루 12시간씩 쉬는 날 없이 근무했다. 월급은 겨우 20불이었지만 골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자기의 실력을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날개를 단 호랑이

1935년 캐스케이드 호텔은 프로골프 대회를 준비한다. 당시에는 어떤 관중도 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첫 라운드에서 63타를 친 샘은 3라운드가 끝났을 때 3타 차 깜짝 선두에 나섰다. 호텔의 경영진과 헤드 프로는 무명 선수인 샘의 우승을 원치 않았다. 호텔을 홍보하기 위한 대회이므로 유명한 프로가 우승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를 바랐다. 호텔의 바람대로 2번 홀에서 8타를 친 샘은 80타로 라운드를 마쳐 3위로 밀려났다. 우승은 못 했지만 3등 상금으로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GreenBrier 골프 리조트의 프로

샘이 그린 브라이어에서 일하게 된 며칠 뒤에 우연히 그 호텔의 소유주인 알바 브래들리를 만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침 일찍 연습 라운드를 나갔다가 335야드 파 4홀에서 티 샷을 했는데 약간의 역풍을 탄 공이 그린까지 굴러갔다. 공교롭게도 사장 브래들리가 퍼팅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브래들리는 불같이 화냈고, 샘을 즉시 해고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옆에 있던 샘의 캐디가 그 샷을 샘의 티 샷이었다고 말했다. 브래들리는 그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며 믿지 않았다. 샘은 홀로 가서 다시 한번 티 샷이 그린을 때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날 아침 두 번째의 완벽한 티 샷으로 그린을 때렸다. 이후 샘은 브래들리의 개인 코치가 되었고, 든든한 후원자도 얻었다.

 

 

시골뜨기 프로골퍼

1936년 여름 샘은 지방 골프 대회인 웨스트버지니아 오픈과 웨스트버지니아 PGA에서 우승한 후 유명 프로들과 겨뤄볼 수 있는 펜실베이니아의 허쉬 오픈에 참가하기로 했다.

 

샘과 함께 라운딩을 하게 될 크레이그 우드가 던롭 골프공의 스폰서를 받을 선수를 찾고 있으니 잘 쳐보라고 귀띔했다. 크레이그 우드는 1941년 마스터스와 US 오픈에서 우승하게 되는 대선수였다.

 

티 샷으로 나무를 넘긴 우드와 샘이 그린으로 다가가자 두 개의 공이 보였다. 자기의 티 샷이 아주 잘 맞았다고 생각한 우드는 당연히 자기의 공이 더 멀리 갔을 것이라 믿었다. 확인해 보니 그린을 넘긴 공은 샘의 공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드는 던롭과의 계약을 제악했고 샘에게는 처음으로 공식 스폰서가 생겼다.

 

신데렐라가 된 루키

샘은 1937년 PGA 투어에 루키로 출전하여 자기의 첫 시합인 LA오픈에서 600달러의 상금을 벌었다. 다음 시합을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 오픈이었다. 비바람 속에서 시작된 시합이었지만 샘은 2라운드에서 65타를 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샘은 270타로 우승하고, 1,2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PGA 투어 첫 번째 우승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신문에서는 무명 촌뜨기의 깜짝 우승이라고 보도했다. 샘의 루키 시즌은 신데렐라의 성공신화와 같았다. PGA 5승을 챙겼고, 2위 세 번, 3위 다섯 번을 달성햇다. 상금 랭킹 2위를 차지했고 라이더 컵 팀의 미국 대표로 선발되어 영국까지 갈 수 있었다.

 

천국과 지옥의 1938년

1938년 두 번째 시즌에서 샘은 PGA 8승, 2위 여섯 번, 3위 세 번을 차지했다. 상금 19,000달러를 벌어들이고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PGA 최저 평균 타수 상인 바든 트로피까지 받았다.

 

샘은 1938년 펜실베이니아주의 쇼니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다. 36홀 패치 플레이 결승의 상대는 폴 런얀이었고, 미디어와 팬들은 10대 1의 확률로 샘의 낙승을 예상했다.

 

런얀은 170cm에 59kg의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1934년 상금왕을 차지했고, PGA 챔피언십을 우승한 강자였다. 시합이 시작되자 샘의 드라이버 샷은 런얀보다 거의 100야드씩이나 멀리 나갔다. 그러나 런얀은 정확한 아이언 샷과 쇼트게임으로 샘의 공격을 철통같이 막아냈다. 결과는 샘이 8대 7로 대패하고 말았다. 런얀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샘은 언제나 최고의 웨지 플레이어로 인정받았지만 런얀의 쇼트게임 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 메이저 우승 기회를 놓친 샘은 쇼트게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웠다.

 

샘은 PGA에서 두 번이나 메이저 대회의 패배를 안겨준 랄프 걸달을 준결승에서 물리친다. 하지만 동갑내기 라이벌 바이런 넬슨과 36홀 매치 플레이의 사투를 벌인 끝에 1홀 차이로 패배하며 메이저 대회의 불운을 떨치지 못한다.

 

1941년 PGA 6승을 올리면서 다시 리듬을 찾았다. 하지만 기자들은 샘이 메이저 대회의 준우승 징크스 기사만을 보도했다. 샘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커졌다.

 

1942년 PGA 우승

1942년 PGA 챔피언십은 뉴저지의 시뷰 컨트리 클럽에서 열렸다. 샘이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짐 터네사였다. 그는 8강전에서 벤 호건을 이기고, 4강전에서는 바이런 넬슨을 격파한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터네사와의 승부는 17번 홀에서 끝났다. 1홀을 앞서고 있던 샘이 20미터짜리 칩 샷을 그대로 성공히키면서 2대 1로 이겼다. 생에 첫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메이저 대회 준우승의 징크스에서 해방됐다. 샘이 이룩한 메이저 7승의 기초라고도 볼 수 있다.

 

1949년 PGA에서는 전년도 챔피언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로 불참하게 됐다. 샘은 비교적 쉽게 두 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1951년에는 세 번째 PGA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했다.

 

1946년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해군에서 근무한 샘은 조종사들에게 골프를 가르쳤다. 덕분에 기량이 녹슬지 않은 상태로 전역했다. 제대 후 1945년에 참가한 첫 6개 대회에서 5번 우승을 했을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1946년이 되자 샘의 스폰서 윌슨에서는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개최될 브리티쉬 오픈 참가를 요청했다. 전쟁으로 인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중단되었다가 새로 열리는 대회였다. 윌슨사는 미국 골퍼가 우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요청한 것이다.

 

세이트 앤드루스에 도착한 샘은 폐허가 된 골프장처럼 보이는 올드 코스를 보며 실망했다. 예선을 가볍게 통과한 후 첫 라운드를 71타로 무난하게 출발했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 70타로 선두를 1타 차이로 추격했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 74타를 쳐 공동 선두가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 때에는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면서 언더 파의 스코어를 내기가 어려웠다. 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어려운 조건임을 상기하면서 묵묵히 경기를 이어갔다.

 

전반 9홀을 40타로 끝낸 샘은 나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인내 끝에 도달한 10번, 12번, 14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샘은 선두가 되었다.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올드 코스의 악명높은 17번 로드 홀을 마주했다. 장타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샘은 OB 지역을 넘기는 티 샷을 성공시킨 후 기적적인 버디를 잡으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71-70-74-75 총 290타로 함께 원정간 샘의 절친한 친구 조니 불라를 4타 차이로 누르는 여유 있는 우승이었다. 이것은 샘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마스터스 챔피언

1949년 마스터스 대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로 불참했다. 그것이 샘의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73-75 타로 부진한 출발을 한 샘은 선두 맹그럼에게 5타를 뒤지고 있었지만, 3라운드에서 67타를 쳐 공동 선두가 된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다시 57타의 맹타를 이어갔다. 2위와는 3타 차이가 나는 마스터스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다.

 

1952년 마스터스는 3, 4라운드 때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세게 불면서 플레이가 어려워졌다. 첫 두 라운드를 70-67 타로 출발한 샘은 벤 호건을 3타 차로 앞서는 선두를 잡았다. 3라운드에서는 77타로 부진해 호건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79타를 친 호건은 우승 경쟁에서 멀어진다. 72타를 친 샘이 2위와 4타 차 우승을 하며 두 번째 마스터스 우승을 신고한다.

 

1945년 마스터스 우승은 샘이 1942년 PGA 우승 다음으로 감격했던 순간이었다. 1953년에만 마스터스를 포함하여 메이저 3승을 올렸던 벤 호건을 연장전에서 누르고 차지한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전반 8홀이 끝났을 때 두 선수 모두 1언더 파로 팽팽했다. 벤 호건은 16번 홀에서 보기를 범한다. 선두를 유지한 샘은 결국 70-71 1타 차이로 세 번째 마스터스 우승을 챙기게 된다. 이 우승은 샘의 7번째 메이저이자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다.

 

 

US Open의 불운

샘은 메이저 대회 7승을 올리면서도 US Open에서는 번번이 우승을 놓쳤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달성도 불발로 끝난다. 미디어에서는 그의 불운을 ‘스니드 징크스’라고 불렀다. 샘은 마스터스에서 10번 이상의 우승 기회를 놓친 후 6년 동안 3번의 우승을 했다. 그러나 US Open의 우승컵은 끝내 그를 외면했다. 샘은 US Open을 우승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선수다.

 

다시 온 전성기

샘은 자기 힘의 85퍼센트만으로 치는 부드러운 스윙을 시작했다. 페어웨이를 지키게 된 그의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2년 연속 최저 평균 타수 상인 바든 트로피까지 수상한다.

 

1949년 첫 번째 마스터스 우승과 PGA 챔피언십의 우승으로 메이저 2승을 챙기며 PGA 6승을 올린다. 1950년에는 샘 생애의 최다승인 PGA 11승을 기록한다.

 

 

전설의 말년

노년기가 된 후에도 샘의 골프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는다. 1980년 시니어 PGA 투어가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명예 회장을 맡아 봉사까지 했다. 스타 중의 스타였던 샘이 시니어 투어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골프 팬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시니어 PGA 투어는 2002년부터 이름을 챔피언스 투어로 변경하였으며 2013년에는 27개의 대회가 열릴 만큼 큰 투어가 되었다.

 

 

샘 스니드의 스윙

샘은 골프 스윙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그립에 있다고 강조했다. 손에 의해서 클럽 페이스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립을 잡는 손의 압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손안에 있는 비둘기가 죽지 않게 그러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립을 잡으라고 했다.

 

스윙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한 그립의 압력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두 손의 V 모양이 오른쪽 어깨를 가르치는 뉴트럴 그립을 사용해야 임팩트 순간에 클럽 헤드가 쉽고 자유롭게 공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샘은 골프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과 타이밍이며 그것이 힘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스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리듬, 템포, 타이밍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밸런스라고 강조했다. 샘은 밸런스를 연습하기 위해 가끔 맨발로 연습 라운드를 했다. 스윙 때 엄지발가락을 땅에 박는 느낌으로 누르며 밸런스를 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