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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토리] ‘골프의 신이라 불리는 남자’ 벤 호건

지이코노미 박진권 기자 | 이 세상에서 골프 샷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벤 호건 한 명뿐이다. 호건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그는 친구 한 명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유난히 작은 체격으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11살 때부터 골프장 캐디를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17살에 프로 골퍼가 됐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프로 데뷔 10년 만에 첫 승을 올린다. 우승 이후 최고 전성기를 달리는 호건은 자동차 사고로 오랜 시간 재활을 받는다. 그럼에도 메이저 9승에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전략의 천재라고 불린 그는 여전히 자만하지 않고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골프의 신이라고 불리는 남자. 그의 이름은 벤 호건이다.

 


EDITOR 박진권 자료 출처 박노승 <저 멀리, 더 가까이>

 

 

캐디로 시작한 골프 신의 탄생
벤 호건은 1912년 8월 13일 텍사스주의 더블린에서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체스터 호건은 우울증을 앓다가 37세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자살 순간에 벤과 다른 가족들은 작은 집 안에 함께 있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자살 장면을 목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를 잃은 후 어머니가 혼자서 아이들을 길러야 했다. 어린 벤은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돕기로 결심한다. 그는 기차역에서 신문을 팔기로 했다. 더 좋은 자리에서 판매하기 위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와 싸웠다. 신문을 다 팔지 못한 날에는 대합실에서 신문을 베고 잠이 들었다. 형이 찾으러 와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11살 무렵엔 친구의 추천으로 골프장 캐디가 되었다. 18홀의 백을 메면 50센트 이상의 수고비를 받았다. 11km 떨어진 글렌 가든 컨트리클럽을 걸어서 갔다. 나이가 많고, 체격이 큰 캐디들은 벤을 얕잡아보고 시비 걸었다. 싸움꾼이었던 벤은 당당하게 맞섰고, 맞아도 절대 울지 않았다.

 


캐디들은 서로 욕하고 싸우며 도박까지 했다. 담배도 피웠는데 이때 담배를 배웠다. 거친 캐디들과 똑같이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평생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태우게 된다.


어느 날 캐디 마스터가 벤을 불러 또래 골퍼 댄 그린우드의 캐디를 맡겼다. 캐디들은 동년배의 골프백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벤은 그린우드와 친해지게 되었다. 3번 홀부터 클럽 하우스가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린우드는 벤에게 클럽을 빌려주며 함께 플레이했다. 매니저에게 들키면 캐디에서 쫓겨나게 될 위험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부자들을 바라보며 사회적 열등감이 생겼지만, 골프에 대한 열망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바이런 넬슨도 같은 골프장에서 캐디 생활을 지냈다. 벤과는 다르게 다른 캐디들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다. 무엇보다 잘 생기고 싹싹한 성격 때문이었다. 바이런은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싸움과 도박을 멀리했다. 벤과 바이런은 서로 양극단이라고 할 만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다만 최고의 골퍼가 되기 위한 열정은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다.


1927년 크리스마스에 캐디를 위한 골프 대회가 열렸다. 일 년에 한 번 멤버가 친한 캐디에게 클럽을 빌려주고 직접 캐디도 하는 행사였다. 벤과 바이런은 파 37에 39타를 쳐서 공동 선두가 되었다. 9홀 모두 돌아서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마지막 홀에서 롱 퍼트를 성공한 바이런이 41을 쳐서 한 타 차로 우승하게 되었다. 그 이후 20년 가까이 바이런은 벤을 앞서 나가며 경쟁 우위를 가지게 된다. 벤은 1946년 바이런이 은퇴한 후에 전성기를 맞는다.

 


다음 해 봄에 클럽에서는 캐디 중 한 명을 뽑아 멤버십을 주기로 한다. 클럽의 선택은 바이런 넬슨이었다. 16살이 된 벤은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캐디를 할 수 없었다. 글렌 가든의 레인지에서 연습을 희망했지만, 클럽 매니저가 허가 하지 않았다. 호건과는 다르게 멤버가 된 바이런은 아마추어 시합에 참여하며 우승을 거두었다. 벤은 멤버자격이 안되어 대부분 참가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역시 돈이다
1938년 벤은 마스터스 시합에서 처음으로 초대되었다. 기대와는 달리 75-76-78-72를 쳐서 25위의 초라한 성적으로 끝났다. 벤은 자기의 영웅인 보비 존스를 만나고 연습 라운드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런 벤에게 보비 존스는 골프선수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마스터스 이후 벤의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리더 보드의 상단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하자 맥그리거에서 벤을 후원하는 계약을 제안했다. 연간 천 달러와 골프클럽 한 세트를 받고 회마다 공을 한 박스씩 받는 조건이었다.

 

그해 9월 피카드는 자기가 근무하는 골프장인 허쉬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파울-볼 인비테이션 토너먼트에 벤을 초대했다. 투어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16명을 초대했고, 벤만 무명이었다. 신문에 참가 선수들의 프로필과 성적이 나왔지만, 벤의 성적은 빈칸이었다. 대회 주최자인 허쉬 초콜릿의 회장도 벤이 누구인지 피카드에게 물었다. 피카드의 답은 간단했다. 벤은 언젠가 위대한 선수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벤은 26세의 게치라는 선수와 한 팀이 됐다. 벤의 조는 최연소이자 최약체 팀으로 평가됐다. 예상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첫날에 61타를 치고 선두를 달렸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플레이하여 우승까지 차지했다. 벤은 7라운드 동안 참가 선수 중 가장 많은 버디를 해냈다. 개인전의 우승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초의 우승이며 가장 큰 상금을 받았다.


1940년 3월 드디어 벤이 준우승의 징크스를 떨쳐내고 우승했다. 지난 10년 동안 가난과 싸우며 생존을 위한 사투를 했다. 벤에게 첫 번째 개인 우승,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의 3주 연속 우승이 찾아왔다.

 


첫 우승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파인 허스트 골프 클럽에서 열린 남북 개방 오픈이었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바이런 넬슨을 만났다. 그는 맥그리거에 특별 주문하여 만든 드라이버를 벤에게 선물했다. 벤도 맥그리거 소속이었지만 이류 선수라 특별 제작 클럽을 받을 수는 없었다. 벤은 첫 스윙에 그 드라이버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합 첫날 1번 홀에서 벤의 드라이버 샷이 장타가 나면서 페어웨이의 가운데를 갈랐다. 새 드라이버로 무장한 벤은 페어웨이를 놓치는 일이 없었다. 아무도 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3주 연속 우승하는 동안 벤의 스코어는 66-67-74-70-69-68-66-67-67-68-69였다. 12라운드 34언더 파, 더 놀라운 것은 216홀 동안 그린을 두 번밖에 놓치지 않은 것이다. 1940년 벤은 4승을 하며 상금왕에 올랐다. 같은 해 최저 평균타 상인 바든 트로피도 받았다. 훗날 벤은 말했다. “나는 집중하는 능력, 관중과 경쟁 선수 들을 무시하는 능력, 나의 마음을 게임에만 열고 다른 상황을 모두 잊는 능력을 갖춘 후에 우승할 수 있었다.”


허쉬 골프 클럽의 헤드 프로였던 피카드는 더 좋은 조건을제시하는 클리블랜드의 골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후임 자리로 벤을 추천했고, 허쉬는 벤을 받아들였다. 허쉬의 연봉과 근무 조건은 벤이 받아왔던 대우와 비교하면 파격적이었다. 이후 벤은 허쉬에서 10년 동안 헤드 프로로 일하게 된다.

 

 

1948 US OPEN 챔피언
1947년 골프계의 관심은 호건의 독주에 쏠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호건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일반 PGA 대회에서만 7승을 하며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그럼에도 상금은 넉넉했다. 대회에서 2만 3천 달러를 벌고 스폰서의 후원금을 받았다. 허쉬 골프장의 연봉도 적지 않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1948년 호건은 PGA 챔피언십 결승에서 마이크 터네사를 7대 6으로 꺾고 우승했다. 우승 후 호건은 다시는 PGA 챔피언십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보통 메이저 시합들은 4라운드다. PGA 챔피언은 12라운드 이상이라 체력적으로도 성격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2주 후에 US Open이 LA의 리비에라 컨트리클럽에서 열렸다. 호건은 68-69로 샘 스니드를 누르고 276타로 우승했다. 호건의 기록 276타는 US Open 역사상 최저 타였다. 그 기록은 19년 후 1967년 잭 니클라우스라는 괴물에 의해 깨진다.

 


호건은 9번째 참가하는 US Open 드디어 감격의 메이저 첫우승을 이룬다. 이후에도 호건의 우승 행진은 계속됐다. 시즌이 동안 호건은 25개의 대회에 참가한다. 메이저 2승을 포함하여 11회의 우승을 거머쥔다. 17회나 톱 3 이내의 성적을 거두면서 상금왕이 되고 바든 트로피까지 받았다. 비슷한 기간에 호건만큼 많이 우승한 선수는 역사상 없었다. 이때가 호건의 최고 전성기였다.


1949년 1월 10일 호건은 타임지 표지 모델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표지의 머리기사는 “경쟁자들보다 더 잘 칠 수 없다면 그들보다 연습을 더 해라”였다. 연습만이 챔피언을 만든다고 믿는 호건의 슬로건이었다. 호건은 아직 자기 기량이 최고 수준에 오르지 않았다고 믿었다.

 

 

챔피언의 부활
호건은 자동차 사고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샷을 해 보았다. 이동하는 체중을 견뎌야 하는 왼쪽 다리와 어깨에 통증이 있었다. 수천 번의 스윙을 반복하며 고통을 줄여나갔다. 왼발로 체중 이동을 완전하게 하지 못했지만, 전성기의 샷과 큰 차이가 없었다.


호건의 점수는 71-72타였고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2주 후에 리비에라 컨트리클럽에서 열리는 LA 오픈에 참여 신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디어와 팬들은 경악했다. LA 오픈의 첫 라운드가 열리는 날 라커룸에 일찍 도착한 호건은 고무 밴드로 다리를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탄탄하게 당겨서 감고 있었다.


피가 다리 쪽으로 몰려서 부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고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는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고 자주 의자에 앉아야 했음에도 챔피언의 기량을 보여줬다.


그를 따라가고 있는 갤러리들은 호건의 기적적인 컴백을 확인하며 감동했다. 1라운드는 73타로 마무리하고 2라운드에서 69타로 3위를 기록한다. 3라운드에서도 69타를 친 호건이 2위가 되며 우승까지 기대하게 된다. 4라운드에서 다시 69타를 친 호건은 총 280타 4언더 파를 쳐 우승이 확실했다.


그러나, 라이벌 샘 스니드가 마지막 7개의 홀을 남기고 5개의 버디를 잡으며 추격한 끝에 호건과 공동 선두가 되어 18홀의 연장전을 벌인다. 사고 후유증으로 기력이 부족했던 호건은 샘에게 우승을 내주게 된다.

 


신문들은 호건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제 호건의 부활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며 언론과 팬들은 더욱 그에게 환호하게 되었다. 자동차 사고 이후에도 US 오픈과 디오픈 챔피언에 오르며 메이저 6승을 거머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