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이 되던 해, 결혼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벌써 30년이나 미국에서 살았다. 미국 보스턴에서 뷰티살롱을 20년간 운영했다. 오래 사업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큰 위기 없이 해왔다는 데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끼며 ‘평범한 일상’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분기에 한 번 정도 한국에 나와 시니어모델로도 활동하는 김봄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열심히 일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캐’를 찾고 싶었고, 시니어모델에 대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시니어모델 김봄은 그녀의 ‘부캐’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은 결과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에디터가 만난 김봄은 또 다른 자아를 찾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묻어뒀던 진정한 김봄을, 자신의 본캐를 꺼낸 것 같았다.
EDITOR 박준영 PHOTO 엘스튜디오·참사랑사진관
김봄(61세) 씨는 보스턴에서 20년이 넘게 뷰티살롱을 운영했다. 골퍼로서 구력은 20년 정도다. 핸디를 묻자 “그냥 한국말로 ‘백순이’라고 할게요”라며 웃는다. 본인의 사업체 외에도 남편의 태권도 교육재단 일도 돕는다. 남편은 미국 600개 초등학교에 정식 과목으로 태권도를 채택시킨 주인공 김경원 씨다.
김봄은 3개월에 한 번 꼴로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사업상으로 사용하는 카드 포인트를 항공 마일리지로 적립하고 있어서 그나마 부담이 덜하단다. 최근 그가 한국에 들어오는 건 시니어모델 활동 때문인 경우가 더 잦다. 시니어모델 에이전시인 제이액터스에서 초급반부터 전문반까지 수료했다.
“미국에서 유튜브를 통해 한국의 시니어모델 과정을 알게 됐죠. 안 그래도 나를 좀 더 드러내고, 아름답게 늙어갈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던 차였어요. 가서 교육을 받아보니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이 정도로 멋지게 걷고, 바른 자세로 생활할 수 있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자기 자신을 되찾는 취미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몰두했다. 스스로 변화가 느껴지자, 주변에서도 피드백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한테 ‘나 모델이야’라면서 자랑삼는 것보다는 나를 가꿀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자세가 꼿꼿해지니 주변에서도 칭찬을 많이 했죠. 당연히 자신감도 생겼고,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가족과 친구들이 더 응원해줬어요. 대만족이에요!”
시니어들의 시니어모델에 관심도는 상당히 높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막상 도전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혹은 핑계)로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거라고 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원하던 모습이 평범한 가정이에요.
“그런 생각 전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김봄은 단호했다. 그는 시니어모델이라는 취미가 자존감이 떨어지는 시니어에게 그 어떤 것보다 좋은 취미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돈을 많이 쓰면서 하는 사람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아요. 시간만 있다면 정말 시니어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좋은 취미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자존감이 낮아져 움츠렸던 분들이 모델 과정을 하면서 당당해지고, 어딜 가든 허리 쭉 펴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앙드레김 패션쇼 엔딩, 안정환과?
최근 광고시장에서도 시니어모델이 자주 눈에 띈다. 취미로 시작했다는 시니어모델들에게도 제2의 진로가 개척된 셈이다. 시니어모델 김봄의 꿈을 물었다.
“어디까지나 취미로 생각하고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모델로서의 성과라면 지금도 과분합니다. 모델로서 바라는 꿈이 크진 않아요. 환갑 지난 내가 꼿꼿한 모습으로 허리 펴고 어깨 펴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우니까요.”
그래도 모델로서 서고 싶은 무대가 있는지 재차 물었더니 ‘앙드레김 패션쇼’가 나왔다. ‘패션하면 앙드레김 아니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앙드레김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건 모든 모델의 꿈이 아니냐는 반문도. 납득됐지만 ‘무언가’를 더 건지기(?) 위해 ‘앙드레김 패션쇼의 엔딩 포즈를 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김봄은 벌써 설레는 듯 웃으면서도 쉽사리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예전에 안정환 선수가 앙드레김 패션쇼에 나왔을 때 있잖아요. 너무 멋있었거든요.”
솔직히 ‘남편과 함께 서고 싶다’는 감동 모멘트를 기대한 에디터의 마음이 짓궂어졌다. ‘그 당시의 안정환이 아니라 최근의 안정환이라면?’이라고 질문해버리고 말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최근의 안정환 씨 모습도 여전히 멋있던데요?”라는 답이 나왔다.
남편은 오히려 이상형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내가 원하던 그 그림이더라고요.
美 공립학교 600여 개에 태권도 보급한 주인공
안정환과 패션쇼 엔딩을 하고 싶은 김봄 씨지만, 남편 김경원(64세) 씨에 대한 자랑도 끊임이 없었다. 그는 미국 공립 초등학교 600여 개에 정식 체육 교과목으로 태권도를 채택시킨 장본인이다.
타임스퀘어에서 10년째 태권도를 알리는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타임스퀘어 연간 행사 일정표의 6월 란에는 이제 늘 ‘타임스퀘어 태권도 페스티벌’이 기재돼있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태권도’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한국인으로서 태권도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생겼어요.”
김경원 씨의 말이다. 그는 ‘해외에 나와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며 겸양했지만, 이 행사를 기획하는 데는 무수한 절차와 상당한 비용에 부딪히기도 했다. 매번 어려움을 극복하며 10년을 이어왔고, 대한민국 고유의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국의 문화관광부와 연이 닿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는 건 쉽지 않았다.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만큼 조건이 까다로웠다. 가뜩이나 뉴욕, 그것도 타임스퀘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사용하는 것도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정부의 도움을 받지는 못한 채 자비로 행사를 치렀다. 지금은 수십 개 학교, 수많은 국가에서 참여하는 태권도 페스티벌이다.
“행사를 10년 정도 꾸준히 하니 연중행사가 됐어요. 일부러 알리지 않아도 6월 말에는 태권도 페스티벌이 있다는 인식이 생겼죠. 미국 내도 그렇고 주변 국가나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져서 뿌듯하죠.”
이제 매년 6월 말, 타임스퀘어에서는 태권도와 한복 쇼, 전통 혼례식, 난타 공연 등이 종일 열리고, 이를 수만여 명의 외국인들이 운집해 관람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이 행사는 내년 재개를 목표로 벌써부터 뜨겁다.
꿈이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그런 욕심 가져본 적도 없고.
김봄의 꿈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꼭 결혼하고 싶다’ 이런 마음은 아니었어요. 젊을 땐 자기 원하는 타입(아마도 이상형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이랄까 그런 게 있잖아요. 거기 딱 맞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12월 연말 분위기에 이 부부의 러브스토리가 딱 맞을 것으로 여겼던 에디터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
“돌아보면 살면서 남편이 저보다 많이 배려하고 살아온 것 같아요. 부족한 나를 다독이며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죠. 지금 보니까 이상형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인가 ‘이게 정말 참사랑이고 내가 젊었을 때 그렸던 모습이 이거였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튀고,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어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게 꿈이었죠. 큰 탈 없이,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평범한 삶을 꿈꿨기에 현재에 아주 만족해요.”
그래선지 모델로서든, 자연인으로서든 그녀는 “더이상 바랄 게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부러웠다. 부러우면서도 ‘나도 가질 수 있는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주어진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 게 익숙할 뿐이었다. “물론 평범한 게 제일 어렵지만요”라며 웃는 김봄의 꿈은 그저 남편과 건강하게 오래오래 같이 사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만난 행복
뉴욕에서 일하던 남편과 10년의 ‘롱디’ 끝에 드디어 결혼을 결심하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주는 묘한 압박감과 기나긴 장거리 연애에 늘상 애가 탔던 시간이 등을 떠밀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진 거라곤 근거 없는 자신감과지나친 도전정신, 범상치 않은 호기심과 ‘무대뽀 정신’뿐이었다. 그래도 나 스스로 내린 결정을 그저 믿어 보기로 했던 것 같다.
‘찾았다. 나의 흰 토끼!’
“고생했어.” 고.생.했.어. 한마디가, 아니 그 네 글자가 뭐 그리 따뜻하고 감동적일 일이냐고. 불안과 초조, 우려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네 글자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뉴욕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으니.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던 시절 같은 건 이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우린 뜨겁게 사랑했고, 열정적으로 일했다. 마주 보던 연인으로서의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의 시간에 탐스럽게 맺은 꽃봉오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되어 피어났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한결같이 응원하고 의지하며 곁을 지켜준 남편과 착하고 건강하게 잘 커 준 아이들은 뉴욕행을 결심했던 30년 전의 내 선택과 결정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표다. 이제 우린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동반자로 함께 살아간다. 뉴욕에서 만난 나의 행복이 스카이라인을 물들이는 노을처럼 내 마음에 발그레하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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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래도 골프가이드니까, 골프에 대해 묻지 않을 수없다. 구력과 핸디는 어느 정도?
구력은 20년 정도다. 핸디야 매번 다르다(웃음). 그냥 한국말로 ‘백순이’라고 하고 싶다.
Q 라운드를 자주 하는 편인지?
전에는 자주 했다. 미국은 골프 치기 워낙 좋은 환경 아닌가. 한국에서의 라운드 경험은 두 번 정도로 기억한다. 지금은 관절(염)이 와서 골프를 쉬고 있다. 그립을 잡으면 손마디가 아파서 힘들더라.
Q 골프 선진국 미국과 한국 골프의 차이는?
많이 아는 것처럼 미국에서의 골프는 자유롭다. 한국에서 스크린 골프나 연습장을 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골프장도 일이십 분 거리에 즐비하니까 아무 때나 “오늘 골프치러 갈까?” 하면 칠 수 있다. 예약이나 거리, 비용의 압박이 없다는 게 가장 좋다. 캐디나 카트를 꼭 이용하지 않아도 되니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쉽게 골프를 접할 수 있다.
Q 한국은 뒷동산만 가더라도 히말라야 등반 급으로 차려입는 나라다. 어떤 스포츠든 우리에게 ‘장비발’을 뺄 수는 없다. 미국은 어떤가.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프리’하게 치는 편이다. 알다시피 여름이면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입고도 많이 나온다. 물론 프라이빗한 클럽의 경우는 오히려 더 규정이 강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취미로는 농구나 축구, 배드민턴을 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Q 미국인도 내기 골프를 많이 즐기는 편인가?
사람 사는 게 똑같으니까 미국 사람들도 가벼운 내기 정도야 하겠지 싶다. 한국처럼 돈 내기하는 문화는 별로 없다. 어디까지나 스포츠이고, 친목 다지기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내기하는 건 피하는 것 같다.
Q 골프를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는?
필드에 나가면서 ‘오늘 공 안 맞을 거 같은데’ 싶었는데 막상 생각외로 너무 잘 될 때 아닐까? 가장 짜릿할 때는 퍼트인 것 같다. 도저히 들어갈 라이가 아닌 것 같아서 욕심없이 굴렸는데 생각지도 않은 라인으로 굴러가 땡그랑 소리가 날 때(웃음). 다들 그렇지 않을까.
Q 골프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홀인원 같은 건 해본 적 없고(웃음).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많이 짜증 났던 일이다.
한 친구와 라운드를 처음 같이 나갔는데 막상 가보니 라운드는커녕 아예 골프채를 처음 잡아본 이였던 거다. 공을 치지를 못하고, 쳐도 이리저리 구르니까 딜레이가 됐다. 뒷 팀들이 너무 밀리니까 “저 동양인 여자들 골프도 못 치면서 왜 민폐를 끼치느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야유도 받고.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다.
나중에 물어보니 “골프장에 너무 나와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데려가 줘서 거짓말로 많이 쳐봤다고 했다”더라(웃음).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이가 없었다.
Q 미국 생활에 잘 정착했다. 그래도 혹시 후회되는 일은 없는지.
한 번씩 한국이 그리웠을 때 비용 때문에 참았던 게 조금 후회된다. 내가 왜 그때 왜 돈만 생각했을까 싶어서. 이제 와 느끼는 건 ‘때가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후회가 남는다. 이제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하게 단행하고, 도전하는 편이다.
Q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 전까진 ‘욜로’를 외치다 요새는 ‘홀로’를 외친다. 돈 없으면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커진다.
요즘 젊은 세대는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집, 돈, 좋은 차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지표가 되는 건 안타깝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됨됨이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 가진 게 없어도 이 사람의 진정성과 성실함으로 배우자를 선택해야 정말 행복할 수 있다. 둘이 열심히 일하면 돈은 벌 수 있다. 그 과정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서로 얼마만큼 이해하고 잘 이끌어줄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둔다면 현실의 벽이 조금은 낮게 느껴지지 않을까.
Q 올해가 가기 전 꼭 하고 싶은 위시리스트가 있다면? 2023년 신년 계획은?
가족들하고 아이들하고 꼭 여행하려고 했는데 못 했다. 12월에라도 가족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큰딸 일정이 안된다. 그게 가장 아쉽다. 거창한 신년 계획은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매년 내 신년 소원은 별 탈 없이, 큰 사고 없이 지내는 거다. 가족도, 주위 분들도.
Q 에세이 ‘뉴욕에서 만난 행복’은 소소하면서도 감명 깊었다. 10년 롱디도, 결혼에 골인한 것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남편 김경원 씨의 어디에 꽂혀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까 말했듯 어디에 꽂히고 그런 건 아니었다(웃음).
결혼도 어찌 보면 ‘공부’다. 노력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혼 위기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 긴 세월 살면서 없었다면 거짓말 아닌가. 다만 항상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먼저 했던 것 같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금세 반성이 되고, 그러면 화해할 수 있다.
Q 12월은 숱한 로맨스 영화들의 성수기다. 김경원-김봄 부부의 사연을 영화로 만든다면 클라이맥스는 어느 시점이 될까?
이혼 위기였던 그 장면이 아닐까(웃음). 정말 ‘웬수’같고, 이혼 아니면 답이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사실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존심이고, 상황이고, 입장이고, 고집이고 정말 다 내려놓고, 그게 내 진심이라고 말했다. 굳이 꼽자면 그렇고, 솔직히 매일 클라이맥스처럼 사는 게 목표다. 그게 가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