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최영규 기자 | 보험은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에 대비해 미래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제도다. 일반 소비자들이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지금은 건강하더라도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 앞에서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보험 계약은 단순한 상품 거래가 아니라, ‘위험이 발생했을 때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신뢰를 전제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신뢰가 보험사 내부 판단에 따라 사후적으로 흔들린다면, 보험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보험 계약 당시에는 “문제없다”던 판단이, 질병이 발생하자 달라졌다. KB손해보험(대표이사 사장 구본욱)의 보험금 심사 및 지급 과정이 인수 책임을 사후적으로 되묻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사안은 질병 진단에 따른 수술비·진단비 청구 사례다. 계약자 A씨는 심장질환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뒤 KB손해보험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그러나 퇴원 후 상당 기간이 지나도록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고, A씨가 직접 연락한 이후에야 보험금 심사가 지연된 사유가 설명됐다.
■ “문제없다”던 계약…인수는 이미 끝났다
A씨는 보험 가입 당시 설계사와 수차례 상담을 진행했다고 설명한다. 가입 전 병원 진료 및 치료 이력을 충분히 설명했고, 향후 질병 발생 가능성과 보험금 지급 여부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설계사는 “고지상 문제없고, 보험금 지급에도 지장이 없다”는 취지로 안내했다고 A씨는 주장한다.
실제로 KB손해보험은 계약 체결 전 고지사항을 토대로 인수 심사를 진행했고, 부담보나 특별 조건 없이 계약을 성립시켰다. 보험업계에서 인수는 보험사가 위험을 평가한 뒤 해당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판단하는 핵심 절차다. 인수가 완료됐다는 것은 그 판단에 대한 책임 역시 보험사에 있음을 의미한다.
■ 질병 발생 후 뒤바뀐 분위기…“방문조사 필요”
그러나 질병 진단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KB손해보험은 “가입 시점과 질병 진단 시점이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고지의무 이행 여부와 진단의 적정성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며 방문조사를 통보했다. 병원 의무기록 확인을 위해 조사원이 직접 면담을 진행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A씨는 이 방문조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통상적 확인 절차라기보다,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명분을 찾기 위한 사후 검증 과정처럼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이미 인수까지 완료된 계약을 두고, 질병 발생 이후 다시 고지의무를 문제 삼는 구조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수술 이후 환자 신분으로 외부 이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방문조사를 요구한 점에 대해서도 부담을 호소했다. A씨는 “무엇을 문제 삼는지, 어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며 조사 목적과 범위를 서면으로 먼저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 “설계사 통화 녹취부터 확인해 달라”…계약자의 합리적 요구
KB손해보험으로부터 방문조사를 통보받은 A씨는 “계약자부터 복잡하게 조사하지 말고, 가입 당시 설계사와의 통화 내용을 먼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즘은 설계사와 보험사 직원 간 대부분의 상담 통화가 자동 녹음되기 때문에, 당시 어떤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지만 확인해도 고지의무 관련 의문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그는 손해사정인과 보험사 측에 통화 녹취를 확보해 검증한 뒤, 필요할 경우 추가 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보험 계약의 핵심은 고지의무 이전에 ‘질문과 설명의 내용’에 있는 만큼, 설계사 안내와 보험사의 인수 판단 과정을 먼저 검증하는 것이 순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KB손해보험 측은 이러한 요청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고, 조사 목적과 범위에 대한 서면 설명 역시 실제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방문조사가 보험금 지급의 전제 조건처럼 제시되는 구조 자체가 계약자에게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고지의무 위반” 주장에 대한 계약자의 반박
KB손해보험이 문제 삼은 핵심은 고지의무 위반 여부다. 보험사는 A씨가 가입 전 병원 진료 당시 ‘협심증 의심’ 소견과 함께 라식스정 처방을 받았음에도 이를 충분히 고지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문제가 된 라식스정은 이뇨제이다.
이에 대해 A씨는 “가입 당시 질문받은 고지 항목에 대해 사실대로 답했고, 질병 확정 진단이나 치료·입원 사실도 없었다”고 반박한다. 병원 진료 사실 자체는 이미 고지했고, 이뇨제 처방 사실은 손해사정 과정에서야 인지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A씨는 “이뇨제 처방 사실을 일부러 숨길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보험 가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을 감출 이유가 없고, 해당 약을 장기간 복용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보험사가 묻는 ‘현재 복용 중인 약’에 대해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질병 치료를 위해 상시 복용하는 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일시적 이뇨제 처방까지 포함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이뇨제는 특정 질병에만 한정해 사용되는 약물이 아니다. 고혈압, 심부전, 간질환, 뇌질환 등 다양한 임상 상황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범용 약물이다. 단순 이뇨제 처방 이력만으로 대동맥판막기능부전, 승모판막기능부전, 심방세동과 같은 구조적 심장질환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적 견해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이뇨제 처방 이력을 보험금 지급 거절의 핵심 근거로 삼았다. 질병과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약 처방까지 사후적으로 문제 삼아 고지의무 위반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 같은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감기 치료 과정에서 해열제나 진통제를 처방받은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보험금 지급이 거절될 수 있다. 일시적인 발기부전 치료제 복용 이력 역시, 다른 심혈관 질환과 연관될 수 있다는 이유로 문제 삼을 여지도 생긴다. 결국 보험금 지급 여부가 질병이나 사고 자체가 아니라, 과거 모든 약 처방 이력을 사후적으로 재해석하는 구조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다.
■ 방문조사 철회와 재개…기준은 어디에 있나
A씨가 조사 목적과 범위를 서면으로 요구한 바로 다음 날, KB손해보험은 한 차례 방문조사 방침을 철회하고 서면 심사로 전환하겠다고 통보했다. 보험사는 A씨가 실손의료비 보험을 장기간 유지해 온 기존 가입자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방문조사가 진행됐다. 방문조사가 필수였다면 왜 철회됐는지, 서면 심사가 가능했다면 왜 다시 방문조사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이 과정은 보험금 심사 기준의 일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더욱 키웠다.
■ 인수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보험사는 “일반적인 절차”라고 설명하지만, 이번 사안은 인수 단계에서 보험사가 책임졌어야 할 판단을 사후적으로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여실히 드러낸다. 계약 당시에는 문제없다며 해당 고지 내용을 전제로 계약을 인수해 놓고, 질병이 발생하자 다시 고지의무와 적정성을 따지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가입 전 병원 진료 사실이 고지된 이상, 보험사는 그 시점에서 질병과 약 처방의 연관성을 검토해 인수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고 발생 이후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보험사가 스스로 설정한 인수 기준을 뒤집는 행위라는 것이다.
지이코노미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KB손해보험에 공식 입장을 요청했다. 인수 이후 질병 발생 시 재조사를 검토하는 내부 기준과, 방문조사 방침이 변경·재개된 경위 등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KB손해보험의 답변 여부와 내용은 추후 기사에 반영할 예정이다.
지이코노미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KB손해보험을 포함해 유사한 보험금 지급 지연·거절 피해를 겪은 독자들의 제보를 지속적으로 받을 계획이다.
가입 당시에는 인수가 승인됐지만, 사고나 질병 발생 이후 고지의무 위반이나 약 처방 이력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이 거절된 사례, 설계사 설명과 실제 심사 기준이 달랐던 사례, 방문조사·손해사정 과정에서 과도한 부담을 겪은 사례 등을 중심으로 추가 취재와 후속 보도를 이어갈 방침이다.
보험은 약속이다. 그 약속이 사후 심사라는 이름으로 흔들리고 있다면, 그 피해는 결국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