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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때 그 선수들 下

 빌 로저스 Bill Rogers  



1981년 디 오픈 우승자, 빌 로저스. 그는 그 해에만 PGA 투어 4승을 포함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 7승을 수확했다. 1980년대 골프계의 포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로저스는 이후 단 1승을 추가한 채 투어에서 사라진다. 최고의 해를 보냈던 1981년 거액의 초청료를 받으며 전 세계를 누볐던 슈퍼스타, 부르는 것이 곧 몸값이던 골퍼는 결국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단어를 상기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청야니 Yani Tseng  



이제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LPGA는 그야말로 청야니 세상이었다. 2011년 브리티스 여자오픈에서 청야니는 22세의 나이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뿐 아니다. 청야니는 남녀 불문하고 최연소 메이저 통산 5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당시 골프 팬들의 시선은 모두 청야니를 향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에는 초반 3연승을 차지하며 비로소 청야니가 골프 여제로 가는 수순을 밟는 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다음 6개 대회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 청야니는 ‘컷 오프’를 당하는 등 갑작스럽게 슬럼프를 겪었다. 역사를 쓰고 있는 최연소 골프에게 있을 법한 일시적 압박감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내팽개쳤다. 그 후 지난 오늘날까지 청야니는 추억의 이름이 되었다. 아직 26세이니 부활할 수 있다고 혹자는 말한다. 헛된 희망이다. 청야니보다 어리고 강력한 선수를 지금 당장 20명 이상 언급할 수 있다. 청야니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왕관의 무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결국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청야니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김하진 Anthony Kim 
 


PGA 투어 통산 3승을 거두고 한때 세계 랭킹 6위에까지 오른 재미교포가 있었다. 바로 앤서니 김이다. 호쾌한 장타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한국에도 수많은 팬들이 있었다. 앤서니 김은 행보도 개성 넘쳤다. 주먹만 한 허리 버클에 자신의 이름 약자인 ‘AK’를 다이아몬드로 새겨 넣었다. 지금은 리키 파울러가 자주 써 화제인 일자 챙 모자도 원조는 앤서니 김이었다. 당돌한 면까지 있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우즈를 넘는 것이 목표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호랑이 잡을 사자, ‘라이언’ 앤서니 김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PGA 투어도 화제를 몰고 다니던 앤서니 김에게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런 그에게도 부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2012년 5월 앤서니 김은 왼팔 힘줄에 생긴 염증으로 인해 그해 정규 시즌을 접기로 발표했다. 그 후 그는 지금 까지 필드 어느 곳에서도 그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문은 무성했다. 100억 원에 달하는 부상 보험금으로 인해 투어에 복귀 안 하는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반론도 있었다. 투어에 복귀한다면 더 많은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보험금 때문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언론을 피해왔던 앤서니 김이 결국 지난 2015년 자신의 근황을 AP 통신에 밝혔다. 그는 골프는 좋은 추억이었다고 밝히며, 투어 복귀에 비관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보험금에 대한 입장도 내놓았다. 돈 때문이 아닌 삶 때문에 골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서니 김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그가 아닌 이상 모른다. 단지 앤서니 김은 선택을 한 것뿐이다. 

방제일 기자 reijir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