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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부터 우승까지  "롤러코스터 같던 2022년"  한진선 프로

2022년 6시즌 만에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한 KLPGA 한진선 프로. 2023년 그가 가장 듣고 싶은 건 ‘강단있다’는 평가다. 에디터가 만난 한진선은 ‘악바리’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잠깐씩 중계 화면에 잡히는 모습처럼 무던하고, 덤덤하기만 한 캐릭터도 아니었다. 인터뷰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한진선을 잘 모른다.’

 

‘미녀골퍼’, ‘맛집 내비게이터’ 한진선과의 Q&A

Q. 우승 후 맞는 휴식기는 처음이다. 어떤가?
작년까지만 해도 2021년만 해도 우승 없이 시즌이 끝나서 ‘올해도 마무리 했구나’ 정도, 시드 잘 유지하고 편안하게 마무리했다는 느낌이었다면, 올해는 축하도 워낙 많이 받았고, 좋은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휴식기예요.

 

Q. 우승 소감에서 할머니 얘기를 가장 먼저 했다. 할머니는 뭐라고 하시던가?
할머니가 연세가 좀 많으세요. 그래서 우승했다는 의미를 얼마나 크게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사실 우승을 했건 못 했건 항상 똑같이 말씀해주시기는 해요. “잘했다, 고생했다”고. 항상 듣는 말이지만, 저는 또 다르게 들리기도 했고요. 

 

Q. 할머니와 유독 각별하다. 수상소감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기도 했고. 사연이 있는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키워주셨어요. 부모님은 맞벌이하셨으니까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고, 자연스럽게 정이 많이 들었죠. 지금도 같이 살고 계시니까 더 그런 생각이 많이 들고, 여러 인터뷰에서도 얘기했듯이 우승하면 꼭 할머니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어요.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를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게 많고요.

 

Q. 전지훈련을 앞둔 휴식기다. 어떻게 지내는지?
열심히 놀고 있고요(웃음). 맛있는 것도 먹고 하는데, 사실 너무 짧아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울상). 논다고는 하지만 운동도 해야 하고, 내년에 준비해야 할 부분도 수정하고, 고민할 게 너무 많아요. 그러면서도 잠깐이나마 자유를 만끽하기도 해야 해서 틈틈이 여유를 좀 즐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Q. 12월 싱가폴 대회에 다녀 왔다. 다만 이번 인터뷰에서 우리의 관심은 대회보다는 ‘먹방’이다. 오랜만의 해외 일정이라 맛집 탐방도 예고했었는데, 음식은 어땠나. 어떤 게 가장 맛있었는지.
싱가폴에 칠리 크랩이 엄청 유명하더라고요. 저는 몰랐어요. 일단 살이 꽉 차 있었고, 엄청 부드러웠고, 마지막에 볶음밥처럼 밥을 비벼 먹으니까…아주 소스가(이곳은 맛있는 녀석들이었던가…). 대신 물가가 정말 비쌌어요. 햄버거 먹었는데 10만 원이 나왔다니까요?

 

Q. (어이 고광렬이, 아니 한진선이…) 솔직해져 보자. 햄버거를 여러 개 먹었겠지.
아니, 진짜 햄버거 하나! 진짜 하나! 사이다도 나눠 마시고, 감자튀김 하나! 이렇게 먹었는데 10만 원이 나왔어요. 칠리 크랩도 3명이 갔는데 한 30만 원 나오고. 물가가 정말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뭘 사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 외에는 그냥 간식거리 정도만 사 먹었죠(웃음).

 

Q. 너무 먹는 질문만 한 것 같다. 대회는 어땠나.
같이 친 선수가 홀인원을 했어요. 

 

Q. …끝인가?
3년 동안 운이 좋을 예정이에요(웃음). 

 

Q. 소문난 맛집 내비게이터라는 평가가 있다. 맛집 탐험가 한진선의 입맛이 궁금하다. 좋아하는 음식은? 
일식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때 2~3년 동안은 아침에 일어나서 고기를 먹었어요. 그때 좀 질렸나 봐요(웃음). 그래서 회 종류가 좋고요, 고기도 구워 먹는 것보다는 샤부샤부를 좋아해요.

 

Q. 우승하던 날 저녁 메뉴는?
소고기 먹었어요(으응?).

 

Q. 스트레스받을 때 찾는 음식?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음식이 있는지? 
라면. 마라탕도. 얼큰하게 후루룩 말아먹으면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아요. 디저트류도 좋아하지만, 운동선수가 즐겨 먹기에는 부담스럽잖아요. 음식을 좋아하지만, 시즌 끝나고 여행 가는 상상을 한다거나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Q. 이번 시즌 후 여행가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다녀왔는지?
제주도로 다녀왔어요. 원래는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이틀 연속으로 결항이 돼서 5박 6일을 갇혀있다 왔더니 여행객이 아니라 약간 난민…처럼 되더라고요. 많이 힘들었어요. 본의 아니게 일정이 지연된 거라서 즉흥적으로 움직이게 됐는데 그것도 나름 재미있었어요. 저는 원래 계획적인 타입(INTJ)인데 다 틀어지고(웃음).

 

Q. 제주에서는 뭐가 가장 맛있었나? 추천
‘돗통’이라는 식당이었어요. 흑돼지는 사실 대회 다니면서 자주 먹는 메뉴인데 깜짝 놀랐어요. 너무 맛있어서.

(본 매체와 한진선 프로 어느 쪽도 해당 업체에서 제공받은 것이 없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Q. 해외여행 한다면 꼭 가고 싶은 곳?
영국, 프랑스. 친언니가 그렇게 좋다고 얘기를 자주 했어요. 유럽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 앉아있기만 해도 힐링되더라고.

 

Q. 친하고, 의지하는 동료선수? 
사실 특정 몇 명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요, 저는(웃음). 이정민 언니나 슬기 언니, 소영이도 친하고. 같은 팀이었던 분들한테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굳이 고민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만나면 기분 좋고, 편하고 재미있는 사이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아요.

 

Q. 쉴 때는 뭐하나?
먹는 거 좋아하고, 꾸미는 걸 좋아해서 아이쇼핑도 자주 해요. 귀차니즘이 있어서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요.

 

Q. 최근 재밌게 본 작품, 한진선의 추천작은?
환혼(넷플릭스). 근데 안 본 사람 엄청 많아요. 어제도 열두 시 반까지 그거 보다 잤어요.

(환혼은 명작이다. 편집자 주)

 

Q. 만약 골프 선수 말고 다른 직업을 택한다면 해보고 싶은 것?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정말 아무거나 할 수 있다면?
(한참 고민하다) 연예인요. 

 

Q. 배우라든지 가수라든지?
어떤 분야든요(웃음). 연예인은 자기를 꾸미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잖아요. 그게 부러워서요. 골프 선수는 힘을 더 많이 써야 하고, 특히 여자로서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할 수 없는 것들, 버려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연예인은 그런 부분을 챙기는 것도 자기 일이고, 자기 일에 도움이 되는 게 부러워요.

 

Q. 듣고 보니 그렇다. 미녀골퍼 한진선 프로도 꾸미면 ‘수지’ 아닌가. 
(손사래) 아니, 아니 그거 잘못됐어요.

 

Q. 아니, 본인 입으로…(유튜브 SBS GOLF 채널 안캐디 EP. 12 참조)
그거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는…

 

Q. 거기까지만 듣겠다. 
아니, 아니. 저는 동의를 안 해요!

 

Q. 골프가이드에서 지난 우승 후 동탄 주민들에게 레슨했던 소식을 전했었다. 당시에 반응이 좋았는데, 최근 동네 분위기는 어떤가. 지나가다 마주치면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거나?
제가 모자를 쓴 거랑 벗었을 때 차이가 큰가 봐요(웃음). 못 알아보시는 분들이 더 많고, 사복 입고 다니면 정말 아무도 못 알아보세요. (스폰서 패치를 가리키며) 이런 게 달려있어야 알아보시고.

 

Q. 한진선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
사람이 넘칠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그걸 안고 있는 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까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너무 풍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한진선의 롤모델이 있다면?
고등학교 때 이보미 프로님(이보미 프로는 여자 프로선수들의 단골 롤 모델이다). 고2 때인가, 우연히 전지훈련을 같은 곳으로 가게 됐어요. 그때 같은 팀이 아닌데도 정말 잘 챙겨주시고, 선행도 많이 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1년에 7, 8승 하시던 때니까 실력으로도 존경스러웠고. 나중에 나도 성공하더라도 이보미 프로님처럼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Q. “인생 전체로 봤을 때 결혼 잘 하는 게 최종목표”라고 했다. 막연하게라도 가지고 있는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을 것 같다. 몇 살 때쯤, 어떤 사람과 등등 소설을 써보자.
사실 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결혼에 대한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주변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결혼 일찍 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특별한 로망이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답변이 너무 재미가 없죠?

 

Q. 아…그…미래의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면(다급)?
어…행복하게…남은 미래를 잘살아보자. 싸우지 말고. 맞아요, 이거?


 

독기에 대하여
독기. 솔직히 한진선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욕심이 없어서, 독기가 없어서 우승권에 머무른다는 세평에 한진선 프로는 “내 경우는 오히려 욕심이 독이 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하이원 대회에서는 사실 우승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기로 마지막 날 경기를 시작했고, 타수도 3타 차였기 때문이다. 그게 오히려 편안하게 경기를 운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편안하게 플레이하니까 자연스럽게 찬스가 더 자주 오더라고요. 다른 시합 때는 보기를 했어도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라고 생각을 하는 편이었는데, 플레이는 점점 더 안 됐죠. 편안하게 나를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좀 내려놓고 경기했던 게 우승 요인이지 않았나 싶어요.”


3라운드 더블 보기를 범했음에도 4타를 줄이며 챔피언조에 들고, 4라운드 보기로 시작하며 마음을 비운 경기가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한 경기가 됐으니 ‘내게는 욕심이 오히려 독’이라는 그의 말도 이해가 간다.

 

스윙 연구가의 ‘그 표정’
한진선 프로를 골프 대회 중계 화면으로만 접해본 입장에서 그는 뚱하거나 해맑거나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는 입술이 삐죽 나와 있고, 그 외엔 천진난만하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내게는 뚱해 보였던, 그 표정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윙 메커니즘을 점검하고 있는 얼굴이었다는 것.


한진선은 의외로(?) 연구가다. 스윙 하나하나에 들어간 고민과 생각의 깊이가 깊다
“생각이 많아요. 경기 전날까지도 스윙에 대해 생각하다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경기 중에 물론 답답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를 아는 사람들은 “네가 생각을 한다고?!” 반문한다지만, 스윙 메커니즘에 관심이 깊어서 레슨 콘텐츠에 출연할 때 특히 생기가 돈다.


“평소 스윙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레슨 프로그램은 그간의 생각들, 과정이나 결과들을 말할 좋은 기회잖아요. 그래서 재밌어요. 빠지면 파고드는 성향이라서 레슨 얘기할 때 질문받고, 질문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해요.”


항상 시합이 끝나면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다음 시합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노력한다. 그런 시간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다음 시합에 가보면 지난번 반성한 그 부분은 잘 되는데, 생각지도 않던 다른 부분이 안 될 수 있죠. 골프라는 게 그렇잖아요.”

 

남들은 몰랐었던 슬럼프
최상위권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한진선은 상위 랭크에 자주 이름을 비추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한진선 아직 슬럼프를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첫 우승은 다소 늦어질 뿐, 순위가 많이 밀리거나 시드에 위협을 느낄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던 2년이었어요. 2020년부터 2021년, 2022년 초까지도요. 솔직히 코로나19로 대회가 많이 없어진 게 너무 다행이라고 느꼈을 정도였어요.”


아직도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슬럼프라는 게 늘 그렇듯.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전지훈련을 갔다 왔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감’이 사라져 있더라고요. 그걸 되찾는 데까지가 오래 걸렸어요.”


우리가 특히 지난 2~3년간 한진선의 ‘그 표정’을 자주 보게 됐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 감을 찾기 위해 스윙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던 거였다. 

 

 

롤러코스터의 끝은 생애 첫 우승
그는 한 인터뷰에서 2022시즌을 돌아보며 “롤러코스터같은 한 해”라고 표현했다. 2022시즌 초반까지는 투어 6년 중 가장 많은 예선탈락을 기록한 해였다. 반면 하반기에는 생애 첫 승을 달성했고. 


“샷도 안 되고, 퍼터도 안 됐어요. 골프 자체가 제 생각대로 플레이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한 가지만이라도 잘 되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니까, 하다 보면 찬스가 오기도 하는데 둘 다 안 되니까 답이 안 나온 거죠. 그런 게 당연히 스코어로 연결이 됐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어요.”


한진선의 말에 따르면 지난 2020년 전후부터 슬럼프가 시작됐으니, 따지고 보면 바닥의 바닥을 터치한듯한 느낌이었으리라. 그 느낌이 무서운 건 바닥이라고 느끼는 순간 반등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는지, 더 깊은 나락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었어요. 혹독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시즌 3분의 1이 지날 때까지도 계속 탈락하니까 솔직히 시드 걱정도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요.”


최선을 다해 사지를 버둥거린대도 위로 올라가는 기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손발을 젓지 않으면 바닥은 점점 깊은 곳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법이다. 그때쯤 드는 생각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다. 한진선은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하다가 그냥 흐지부지 끝날 바에 진짜 ‘죽어라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걸 느꼈어요. 그러다 예선 통과를 한 번 하고 나서는 더 빠르게 좋아졌고요. 슬럼프가 오는 것도 탈출하는 것도 계기나 방식은 사람마다 너무 달라요. 제 경우는 한 번에 확 잘 된 건 아니었고, 꾸준히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아요.”

 

뒷심에 대하여
“아니, 우승했는데도 ‘뒷심 부족’ 딱지는 왜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사뭇 억울해 보였다. 사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한진선은 ‘독기가 없다’, ‘뒷심이 부족하다’라는 지적이 그간 꽤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골프만이 아니라 프로 스포츠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1부 무대까지 올라오려면 그런 독기나 뒷심은 필요조건이다. 그러니 다른 것도 아닌, 승부욕이나 독기를 지적받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한진선은 ‘악바리’ 캐릭터는 못 된다. 다만 독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현재 상황에 몰두하는 성향이고요. 미래에 내가 어떻게 돼야겠다거나 하는 그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산 같았던 1부 투어의 벽
그는 “특히 어렸을 때는 목표 설정을 해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2·3부를 뛰며 올려다본 1부 투어의 벽은 헤아릴 수 없게 높게 느껴졌다.
“정말 높은 벽, 그냥 산 같았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 싶고, 열심히 한다고 정말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 느낌. 자신도 없었고요. 근데 막상 (1부 투어 프로가) 되고 나니 그게 또 그렇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더라고요(웃음).”


그는 드림·점프 투어를 뛸 당시를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았다. 2승을 했고, 생각한 대로 골프를 하면 되는 시기였다. 
“사실 성적에 비례할 수밖에 없어요. 그때는 쳤다 하면 잘 쳤어요. 만족도가 높았었죠. 자신감도 높았고, 골프도 굉장히 단순하게 쳤어요.”


대신 1부 투어에서의 우승은 ‘언감생심’이라는 말 그 자체로 느껴졌다.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부분 시드라서 왔다 갔다 했는데, 바로 다음 시즌에 우승 기회가 몇 번 왔었어요.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현실을 깨달았죠. 드림 투어 뛸 때처럼 해서는 절대 우승할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어요. 쉽지 않겠다고.”

 

4라운드 10오버파,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길게 이어진 슬럼프와 연이은 예선탈락, 그런 경기력에서 비롯된 ‘독기’와 ‘뒷심’ 논란이 가장 뼈아프게 발목을 잡았던 대회가 지난 2022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제22회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이다. 


이미 생애 첫 우승을 따낸 뒤 흐름이 부쩍 좋아진 한진선은 이후 출전한 5개 대회에서 3번이나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맞이한 메이저 대회, 3라운드 더블 보기를 범하고도 3타를 줄여 단독선두로 챔피언조에 들었다. 첫 메이저 우승 도전이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다. 파이널 라운드에서 그는 무려 10타를 잃었고, 15위로 대회를 마쳤다. 골프 경력 전체를 통틀어도 그렇게까지 무너진 건 처음이었다. 


“일단 되게 창피하고. 내가 나약한 것 같고.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심리적인 데미지 때문은 아니었는데, 분명 주변 갤러리분들이나 보시는 분들은 ‘기가 많이 죽었다’, ‘쫄았다’라고 말할 것 같았어요. 그게 너무 열 받는 거예요(웃음).”


실제로 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아니다. 분명 누군가 그럴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는 얘기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경험이 된다
“그냥 역시 어렵다. 골프가 진짜…그렇잖아요. 잘 될 것 같다가도 안 되고, 안 되다가도 갑자기 잘 되고.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게 골프니까. 그날도 ‘이 정도까지 무너질 건 아니었는데’라는 후회도 남았고, ‘나 왜 이러고 있지?’ 싶고. 당황을 많이 했어요, 그날은 정말.”


투어 프로들에게 ‘1승’은 정말 중요하다. 우승해본 선수와 아닌 선수의 경험차는 그만큼 크다. 객관적으로도 실력 차가 거의 없는 두 선수라도 1승이 있는 선수가 우승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긴다. 그래서 1부에 올라와 첫 승을 거둔 프로들은 감회가 남다르다. 물론 안타깝게도 1승으로는 그간 선수를 괴롭혔던 ‘딱지’들은 채 떨어지지 못한다.


“방심하지 않으려고 더 노력하게 됐어요. 하이트 대회에서 많이 무너졌던 것도 그냥 경험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고요.”


화면으로 보기에 어땠든 한진선 본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끼면서 투어를 치르지 않았다. 그저 배우는 자세로 묵묵히 투어를 진행한다. 


“타이거 우즈조차도 배울 점이 남아 있고, 완성된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저도 골프를 치는 한 골프채를 놓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려고 하고, 더 잘 하려고 노력할 거에요.”

 

 

삼고초려, 송인식 캐디
한진선은 과거 3년간 호흡을 맞췄던 송인식 캐디와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한진선의 ‘삼고초려’가 있었다.


“제가 연락을 했죠. 호흡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요. 근데 아예 캐디 일을 안 하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안 해주겠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한두 경기만이라도 해달라, 상반기 남은 3개 대회만 해달라고 했어요.”


“그냥 놀러온다고 생각하고 와주세요”라는 간곡한 부탁에 송인식 캐디가 이를 수락했다. 정말로 편한 마음으로 응했다는 대회에서 한진선이 성적을 척척 내기 시작했다. 그걸 빌미 삼았다. “(대회)몇 개나 남았다고, 하반기도 그냥 해줘요, 오빠. 내가 잘 해볼게요”라며 ‘꼬셨다’고.


“일단 라인을 보는 스타일이 너무 비슷해요. 그래서 제 생각을 확신하게 돼요.”


퍼트 라인을 아무리 잘 보더라도 미심쩍으면 손이 덜 나가거나 더 나가기 일쑤다. 특히 프로 레벨에서는 결과는 둘째치고 읽은 라인을 ‘믿고 치는’ 퍼트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빠가 그만두시면 저도 은퇴하려고요”라고 말할 정도로 송인식 캐디와의 호흡은 정서적인 부분에서도 찰떡이다.


“대여섯 시간을 같이 코스 안에 있어야 하잖아요.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게 생각보다 효과가 더 커요. 기분이 안 좋다가도 대화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게 샷에도 영향을 끼치고요. 오빠(송인식 캐디)는 저랑 워낙 오랫동안 했으니까 제 성격도 잘 아시고, 샷이 잘 안되거나 해서 짜증이 났다 싶으면 바로 캐치해서 진정시켜준다거나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골프는 특히 화가 나면 한순간에 많은 게 무너질 수 있는데, 오빠가 그런 포인트를 정말 잘 알아서 케어해주신다고 생각해요.”


내년에도 송인식 캐디가 한진선의 백을 멘다. 그 말을 하는 한진선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인터뷰 자리를 빌어서 캐디님께 한마디를 전하라니 “너무 고맙고, 정말 너무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은퇴할 때까지 같이 해주시면 좋겠어요”라며 흑심(?)을 드러낸다. 


농담 반 진담 반 은퇴 계획을 묻자 “사실 잘 모르겠는데. 오빠가 그만하신다고 하면 저도 은퇴하려고요”라며 은근히 협박한다.

 

“가능성요? 당연히 100%죠!”
2023년 한진선의 목표는 2승과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굳이 꼽자면 어떤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은지 물었다.


“일단은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요. '열 받아서' 안 되겠어요(웃음). 농담이고요. 아쉬운 기억도 있고, 마지막 날 무너지기는 했지만 반대로 3라운드까지는 또 잘 했던 대회이기도 하니까요. 더 자신감을 가지고 이번에는 이겨내 보고 싶어요.”


나 같아도 똑같이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베트남으로 50일간의 전지훈련을 떠난다. 아이언의 스핀 컨트롤 연마,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10야드 향상이 목표다. “가능성요? 당연히 100%죠!” 두말하면 입 아플 것 같은 그런 질문을 왜 했느냐는 듯한 그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쨌든 롤러코스터 같던 2022년은 지났다. 2022년을 돌아보자면 한진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2023년에는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을까. 
“골프는 항상 배움이 많은 운동이잖아요. 많이 배운 한 해였어요. 롤러코스터 같은 한 해를 보내고 나니까 더 많은 감정이 들고,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한 해였던 것 같아요. 2023년은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한진선 강단있네!’ 그런 얘기 듣고 싶고요(웃음).”
 

 

사진 카카오VX, KLPGA 
장소 프렌즈스크린 동탄PRO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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