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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든 그립은 바든이 만든 게 아니다’ 골프 사상 최초의 아이콘 〈해리 바든〉

“해리 바든은 같은 골프장에서 하루에 두 라운드 치는 걸 싫어한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 친 공들이 첫 라운드 때 패인 디봇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만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해리 바든은 골프계 최초의 월드클래스 슈퍼스타이자, 전 세계적 인플루언서다. 미국 PGA에서는 바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바든 트로피’를 제정해 매년 최저 평균 타수를 달성한 선수에게 수여하고 있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그뿐인가. ‘바든 그립’으로도 불리는 ‘오버래핑 그립’으로 현대의 골퍼들에게마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 바든 그립은 사실 바든이 만든 게 아니다.

 

EDITOR 박준영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박노승 지음

 

근대 골프 역사는 해리 바든으로부터 시작한다. 1860년대 초, 톰 모리스 부자가 ‘디 오픈’에서 4승씩을 나눠 가지며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근대 골프 스윙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바로 해리 바든이기 때문이다.


골프를 친지 얼마 안 된 당신이라도 ‘바든 그립’이라는 그립 파지법은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오버래핑, 인터로킹, 베이스볼’은 들어봤어도 금시초문이라고? 그 ‘오버래핑’ 그립이 바로 ‘바든 그립’이다. 그런데 사실 바든 그립은 바든이 만든 게 아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골퍼 John Laidlay가 1889년 브리티시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이 그립을 사용했고, 우승을 달성했는데 바든이 프로 토너먼트에 입성하기 1년 전이다. 영국 골프 역사상 ‘위대한 삼총사’ 멤버이기도 한 JH Taylor도 이 시기에 독자적으로 같은 그립법을 개발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바든은 새로운 그립을 찾기 위해 다른 선수들이 사용하는 변형된 그립을 모두 시험해봤다. 그러다 이 그립이 양손을 일체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됐고, 은퇴할 때까지 사용했다. 그럼 왜 ‘테일러 그립’이나 ‘레이들리 그립’이라고 안 하고 ‘바든 그립’이라고 하느냐? 바든이 당시 전 세계 골프계의 독보적인 인플루언서였기 때문이다.


디 오픈 세 번 우승,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립으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더 큰 존경을 받게 된 건 골프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새로운 스윙 테크닉을 개발해 실제 대회에 적용하고,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바든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스윙은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이라고 불렀다. 그립은 느슨하게 잡아 길고 플랫한 아크를 그렸고, 심한 스웨이를 하는 게 당시의 ‘국룰’이었다.

 

하체는 되도록 고정하며, 손과 손목을 이용해 공을 쳐 냈다.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은 바람이 많이 부는 링크스 코스에서 플레이할 때 적합했다. 낮고 런이 많이 발생하는 구질을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바든은 ‘모던 스윙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이런 넬슨의 기본적인 테크닉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바든의 어드레스는 현대 골퍼들의 자세와 거의 비슷했고, 하체 사용도 이미 모던 스윙에서 추구하는 기본과 같았다.

 

바든의 새로운 그립과 스윙은 탄도를 높게 띄워 더 많은 캐리 거리를 확보했고, 백스핀을 만들어서 그린 위에 세우는 샷을 구현했다. 갤러리들은 감탄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기존의 스윙을 고집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바든이 1896, 1898, 1899년의 디 오픈을 세 번 우승하면서부터다. 그의 스윙을 따라 하는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해리 바든의 5계명

1. 벙어리가 될지라도 남의 플레이에 간섭하지 않고 침묵하라.
2. 자신에게 엄격하고, 동반자에게 더욱 관대하라.
3. 볼은 있는 그대로 스윙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지 말라.
4.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항상 믿어라.
5.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틈나는 대로 연습하라.

 

"한 경기에 12파운드는 못 참지"
바든은 1870년, 영국 남쪽의 섬 ‘저지’에서 태어났다. 동네에 골프장이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캐디도 하고, 공을 주워다 쳐보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했지만, 골프 선수가 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꿈은 정원사였다. 17살 때부터 관련 회사에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20살이 되었을 때, 그는 80타 정도를 치는 로우 핸디캐퍼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소식이 날아든다. 동생 톰이 스코틀랜드 골프장에 취직하게 돼 본토로 갔는데 골프 시합에 참가했다가 2등을 해서 12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는, 되돌아보면 바든의 인생을 바꾼 소식이었다.

 

당시 바든의 연봉은 16파운드였다. 동생이 할 수 있다면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 한 경기 만에 12파운드. 경력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바든은 자신감에 차 영국 요크셔의 9홀 골프장 프로로 취직했다. 말이 프로지 멤버들의 클럽 수리, 코스 관리, 샵 운영 등 하위 계층의 업무가 주였다. 수입도 적었다. 그래도 연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혼자서 연습하며 여러 가지 샷을 하나씩 완성해 나간 바든의 기량은 어느새 놀랍게 향상됐다.


바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샷은 낮게 날아가면서도 백스핀으로 볼을 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는 퍼트였다. 퍼트만큼은 다른 샷에 비해 눈에 띄는 발전이 없었다. 그는 골프 속의 또 다른 게임이 퍼트라는 걸 깨달았고, 퍼트가 약하면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신감은 이렇게나 위대하다
1893년 바든은 생애 처음으로 ‘디 오픈’에 참가한다. 여기서 평생의 라이벌 테일러와 브레이드와 조우한다. 골프 역사가들은 이 세 선수를 가리켜 ‘위대한 삼총사’라고 부른다. 1894년부터 1914년까지 열린 21회의 ‘디 오픈’에서 이 세 선수가 16번의 우승을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바든이 6회, 테일러가 5회, 브레이드 5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1894년과 1895년에는 테일러가 우승했다. 바든은 5위, 9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896년 ‘사건’이 벌어졌다. 디 오픈이 열리기 몇 주 전, Ganton 골프클럽에서 바든과 테일러의 36홀 매치플레이가 벌어졌는데 바든은 테일러를 8홀 차로 꺾고야 만다.

 

몇 주 후 대회장으로 가는 바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번에는 우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바든은 테일러와 36홀 연장전을 치른 끝에 첫 번째 디 오픈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골프에서 자신감은 이렇게나 위대하다.


1898년에는 초대 챔피언을 1타 차이로 따돌리며 우승, 1899년에는 첫 라운드부터 선두를 지키며 또다시 우승컵을 안았다. 골프 팬들은 바든의 플레이에 열광했고 “바든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골프를 본 적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 명성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퍼졌다.

 

골프 패션계 인플루언서 바든?

1898~1899년 연속 우승으로 바든의 주머니 사정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골프 선수 중 최초로 니커보커 바지(무릎 아래에서 졸라매는 품이 넉넉한 바지)를 입으며, 패션마저 선도하기 시작했다.그는 또 바지에 멜빵을 착용하는 걸 선호했는데, 멜빵이 어드레스 때 어깨를 바로 펴는 ‘어깨선 정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손이 남달리 컸던 바든은 평생 장갑은 사용하지 않았다. (멜빵을 어디 뒀더라…)

 

월클 논란 따위 없었던 바든
1900년 미국 스팔딩사에서 새로운 골프공을 개발했다.
Gutta-Pecha라는 이 골프공의 광고 모델은 다름 아닌 바든이었다. 계약을 체결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판촉을 위한 시범 경기를 하게 됐다. 소문에는 당시 바든이 받은 모델료가 1,000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상상은 물론 상식을 초월할 거금이었다. 바든의 입지가 전성기 시절의 타이거 우즈와 같은 슈퍼스타의 반열이었기에 가능했다.


시범 경기를 돌다 1900년 세인트 앤드루스로 돌아와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한 바든은 초반부터 테일러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다. 결국 테일러가 우승을 차지했고, 바든은 2위, 브레이드가 3위에 오르며 ‘위대한 삼총사’가 1, 2, 3위를 모두 차지했다.

 

바든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시범 경기를 하며, US 오픈을 절치부심하며 기다렸다. 당시 시카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US 오픈에서 바든의 우승을 예측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이때 바든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소식이 하나 날아든다.

 

라이벌 테일러가 사상 최초로 ‘디 오픈’과 ‘US 오픈’을 동시 제패하기 위해 미국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펼쳐진 양강 구도
미국 언론은 두 라이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도했다. 물론 사실 그들은 좋은 친구 관계였지만.

 

예상대로 바든과 테일러가 선두 경쟁을 벌였고, 정작 미국 선수들은 3위를 두고 경쟁하며 대회가 진행됐다. 바든이 313타로 우승, 2타 뒤진 테일러가 준우승을 차지했다. 3위를 한 미국 선수는 그보다 9타나 뒤져있었다.

 

이듬해 1901년 ‘디 오픈’을 앞두고 팬들의 관심은 바든과 테일러 중 누가 먼저 4승을 달성하느냐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위대한 삼총사’의 또다른 멤버, 브레이드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바든은 2위, 테일러가 3위로 뒤따랐다. 드디어 바든과 테일러의 양강 구도가 끝나고, ‘위대한 삼총사’의 시대가 열린 시점이다.

 

위대한 삼총사의 시대
1903년 디 오픈에서 4번째 우승을 한 바든은 1904년 결핵에 걸려 장기간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바든은 1910년까지 7년 동안 디 오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1906년 영국 언론은 “위대한 삼총사가 오픈을 독식하는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그해 오픈에서 브레이드가 우승을, 테일러가 2위, 바든이 3위를 차지하면서 삼총사의 입지가 1909년이 되었을 때, 위대한 삼총사는 디 오픈에서 똑같이 4승씩을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 5승을 거두느냐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다음 해인 1910년 브레이드가 먼저 5승을 달성했다. 1911년 바든이 5승째를 쌓았고, 1913년 테일러까지 디 오픈 통산 5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바든은 몇 등석에 탈 예정이었을까?

1913년 바든은 US 오픈에 도전하기 위해 1912년 디 오픈 챔피언인 테드 레이와 함께 미국 원정길에 올랐다. 당초 1912년 US 오픈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대서양을 건너던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로 1913년으로 연기 됐는데, 바든도 타이타닉호에 예약했다가 취소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 대회도 영국 선수끼리 우승을 다툴 것으로 예상됐지만, 미국의 무명 아마추어 선수였던 프랜시스 위밋이 연장 승부 끝에 두 거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디 오픈에서 영국 출신이 아닌 선수가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건 이보다 6년 앞선 1907년이었다. 프랑스의 아르노 마시가 그 주인공이다. 마시는 이후 1911년 디 오픈에서도 바든과 36홀 연장 승부를 펼쳤다.

 

전무후무 6승의 주인공이 되다
이제 영국 골프계는 위대한 삼총사 중 누가 디 오픈 6승을 달성하느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1914년 바든은 접전 끝에 테일러를 물리쳐 가장 먼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6승을 달성한 주인공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1915~1919년에는 디 오픈이 열리지 못했다. 대회가 재개된 1920년, 위대한 삼총사는 이미 50세가 됐고, 더이상 우승 경쟁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1920년, 50세가 된 바든은 US 오픈에 테드 레이와 함께 출전한다. 미국에서는 그를 이미 전성기를 보내버린 과거의 레전드 정도로 생각했지만,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바든이 쭉 선두를 달렸다.


마지막 라운드 11번 홀이 끝났을 때 바든은 4타 차 선두로 우승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체력이 급격히 소모된 바든은 나머지 일곱 개 홀에서 7오버파를 써냈다. 우승컵은 테드 레이에게 돌아갔고, 바든은 1타 차 준우승에 그쳤다.

 


이제까지 이 정도의 인플루언서는 없었다
1922년은 디 오픈 역사상 기록적인 해다. 월터 하겐이 미국 태생 골퍼로서는 처음으로 디 오픈에서 우승하며, 영국의 골프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간 미국의 월터 하겐, 보비 존스, 진 사라센 등이 디 오픈 우승을 휩쓸었다. 영국 골프계는 미국에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이에 1934년 샌드위치에서 열린 디 오픈에 위대한 삼총사 모두가 함께 등장했다. 물론 영국 선수의 우승컵 탈환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건강이 악화된 바든은 3라운드부터는 골프장에 오지 못하고 호텔에 누워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튿날, 위대한 삼총사의 기운을 전달받았던 걸까. 영국의 신예, 27세의 헨리 코튼이 우승컵을 들고 바든의 호텔로 달려왔다. 코튼이 안겨준 우승컵을 품에 안은 바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우승 트로피인 ‘클라렛 저그’에는 그의 이름이 6번이나 새겨져 있었다.


1937년 메이저 7승을 달성한 골프계 최초의 인플루언서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골퍼들의 그립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