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의 시작 : 1921년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
한국 골프의 시작 : 1921년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
  • 김대진
  • 승인 2020.06.1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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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 골프의 시작 : 1921년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            
                                      
   한국에서 최초로 개장한 골프코스는 지금 효창공원(서울 용산구) 일대에 위치했던 효창원 골프장이었다. 최초의 골프장은 효창원 숲을 파헤쳐 만들어졌다. 원래 효창원은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어린 장자 문효세자의 묘가 자리했던 곳이었고, 일제 때 왕실재산을 관리하던 총독부 소속 이왕직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문효세자의 묘 주변은 영국인의 설계로 만들어진 9개 홀 골프코스로 울타리 치듯 빙 둘러싼 모양이었다고 한다. 같은 묘역에는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 등이 있었다. 1)
 
   1917년경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서 조선철도국을 위탁경영할 무렵 한국에도 골프코스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만철은 일개 철도회사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타이완총독부와 함께 ‘일제 3대 식민 통치기구’로 손꼽힌 권력기관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동경골프구락부>나 <고베골프구락부> 등이 설립되어 있었고, 만주에도 <성포골프구락부>가 개장되어 있었다. 만철 경성철도관리국 안도(安藤又三郞)가 대련 본사에 출장 중에 성포골프장에서 라운드할 때 경성에도 골프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련 출장 뒤에 그의 생각을 구체화시켜 만철에서 직영하던 조선호텔 투숙객을 위한 서비스와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조선호텔 부속 골프장을 만들기로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2) 
 원래 이 호텔은 1914년 만철에 의해 환구단의 일부를 헐고, 그 부지 위에 4층 69개 객실 규모로 근대식 건축물을 세워 ‘조선경성철도호텔’이라고 불렸다.
 
 
조선호텔 전경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호텔 전경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효창원 골프코스는 1917년경부터 만철 주도로 당시 한국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1918년 5월에야 골프장 설립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전세계를 강타한 스페인 독감 팬데믹 때문에 골프장 건설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1918년 10월부터 ‘악성 감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1월까지 4개월 동안 14여만 명이 사망한 대재앙이 덮쳤고, 3)  3.1운동 이후 긴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골프장 공사는 9월경에 가서야 착공됐다.

   그때 골프코스 규모는 9홀, 공사 비용은 6천 엔이었다. 효창원 골프장은 처음에 6홀이 만들어지고 나중에 9홀로 확장되었지만, 2년여 동안 난공사 끝에 결국 7홀만 사용할 수 있는 골프코스로 마침내 1921년 6월 1일에 개장되었다. 4)  
   효창원 골프장을 설립하기 위해서 먼저 경성철도국장 쿠보요조(久保要藏)의 허가가 필요했고, 만철 경성철도관리국 운수과장 안도(安藤又三郞)와 조선호텔 지배인 이노하라(猪原貞雄)는 함께 골프장 부지를 물색한 끝에 용산 효창원내 일부 국유지를 임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골프코스 설계는 1915년도 일본아마추어선수권 챔피언으로 당시 일본 고베에서 체류하던 영국인 던트(H.E.Dannt)에게 맡겼다. 여기서 잠깐 던트의 회고록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1919년 5월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초청으로 처음 경성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조선호텔 지배인 이노하라(猪原貞雄)는 골퍼는 아니었지만, 내가 경성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골프코스에 필요한 모든 토지를 마련한 뒤였고, 9홀의 설계만 하면 되는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단지 티잉 그라운드와 벙커, 그리고 그린 위치만 정해 주면 족할 정도로 설계가 되어 있었다.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울창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페어웨이를 만들어 코스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효창원은 묘가 산재해 있어 묘를 치워버리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조선인들이 절대로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다. 코스를 만드는데 여러 가지 애로가 뒤따랐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코스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하여 조심성 있게 다루었다.” 5) 
 
효창원 골프코스의 개요 (출처: 중앙일보 2017년 8월 16일자)
효창원 골프코스의 개요 (출처: 중앙일보 2017년 8월 16일자)

   효창원 골프코스 설계자인 던트의 회고록이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73년 간행된 『한국골프총람』에서 ‘H.E.댄트의 수기’(『총람』에서는 던트를 댄트로 표기)를 통해서였다. 『총람』에서 편집자 주로 언급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 글을 쓰던 중 귀중한 자료를 입수하게 되어 수록한다. 1919년 5월 효창원코스를 설계한 댄트(H.E.Dannt) 씨의 수기를 얻게 되어 그 당시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 수기는 댄트 씨가 1923년 간행된 『록고장(六甲山)과 다른 山들, 그리고 시골이야기』(원제=Inaka or Reminiscences of Rokksan and other Roks)라는 책 속에 수록된 것이다...댄트 씨는 그의 책 속에 「은자들의 왕국 안에서의 골프」(원제=Golf in the Hermit Kingdom)라 제(題)하여 효창원코스 설계 당시와 그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6) 

 또한 그는 효창원 골프코스를 어떤 의도로 설계했는지도 다음과 같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3번홀 :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홀은 효창원 코스 중에서 최고의 명당, 그래서 코스의 이름도 ‘알프스’로 불렀다. 코스 주변엔 낭랑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무성한 나무 사이로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상쾌함, 그리고 한 눈에 남산 중턱에 있는 성벽이 송림 사이로 보여 그 경치는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 이 홀은 200야드, 도그레그 코스지만 방향만 정확하면 파(Par)나 보기(Bogey)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코스 왼쪽에는 길다란 봉우리가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조선 최초의 이 골프코스는 요철이 있는 토지 위에 만들어졌다.(밑줄 필자) 조선반도의 산들은 모두가 미신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용’이라든가 또는 무엇인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산길에는 성황당이 있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은 그곳에서 ‘무사 안녕’을 비는 풍습이 남아 있다.” 7) 
 
   당시에 원산항 해변가에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원산해관 골프코스 기원설’이 존재하지만, ‘구전으로 전해질뿐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혹시 우리가 외국인 조계지로 그 위치 범위를 넓힌다면 갈마반도 쪽에 골프코스가 위치할만한 개연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8) 
 
1973년 간행된 『한국골프총람』에서도 ‘원산해관 골프코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곳은 단지 개인적인(privite) 골프코스일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1921년 6월 1일 개장한 효창원 골프장이야말로 한국골프의 효시라 할 만 하다는 것이다. 9)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 착공은 이왕직의 국유지 효창원 부근에 약 58,000평을 임대하고, 수목 채벌, 코스 잔디, 하우스 건축 등을 포함한 6,000엔 예산으로 시작되었다. 골프코스는 처음에 6홀에서 9홀 코스로 확장됐지만, 실제로 코스 관리의 곤란 때문에 7홀만 사용되었다. 효창원 골프장은 주로 외국인 이용자를 위해서 임시로 일본인 캐디를 고용했고, 하루에 1엔의 그린피와 매월 5엔, 연 25엔씩 하는 회원 제도를 만들었으며, 클럽과 공은 대여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클럽 4개를 한 세트로 해서 하루에 50전씩 대여료를 받았다고 한다. 10) 
 
   효창원 골프장은 남대문에서 자동차로 3, 4분 거리였고, 골프장 근처를 산책하는 시민이나 주변 행인들과 골퍼들 사이에 충돌이 빈번했다고 한다. 당시 천주교 신학교 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다니던 신학교가 ‘원효로’에 소재했는데, 방과 후에는 가끔 효창원에 산책 나갔다가 골프장 밖으로 날아온 골프공 때문에 생기는 골퍼 또는 캐디와 행인과의 사이에 생기는 마찰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11) 
   효창원 골프코스의 애용자들은 만철의 고위 관계자, 은행계 일본인 간부들, 조선호텔 외국인 투숙객들이 주류였다. 총독부 내무국장 오쯔카(大塚三郞), 총독 비서관 나카무라(中村寅之), 나중에 이왕직 차관까지 오른 고지마(兒島高信) 등도 자주 라운드했다. 그들은 일본 도쿄나 고베의 골퍼들처럼 한국에 와서도 골프를 할 수 있다는 현실에 매우 만족했다. 12) 
 그동안 골프를 모르던 한국 상류층도 사교활동을 위한 오락적 근대 스포츠로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효창원 골프장에서 골프대회  (출처: 매일신보 1923년 6월 11일자)
효창원 골프장에서 골프대회 (출처: 매일신보 1923년 6월 11일자)

   당시 효창원 골프장을 찾는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골퍼는 시즌 때 휴일에 7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총독부 고위 관료를 비롯한 경제계 명사들은 일요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라운드를 즐겼다. 당시 경성 상류층의 스포츠인 골프를 모르는 사람은 신사의 자격으로 부족하다고 평가될 만큼 골프에 대한 인기가 높았고, 그러다 보니 남산 일대의 여러 일류 요정에서는 파리를 날리곤 했다는 풍문도 돌았다고 한다. 13) 

   일제 때 일부 상류층의 골프에 대한 인기 정도를 짐작하기 위해서 1924년 4월 ‘종묘 어보 도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골프를 치고 망언을 한 당시 고위공직자에 대한 <동아일보> 비난 기사에 주목할 만하다. 어보 도난 사건이 10일에 발생해 세상이 떠들썩했는데도 11일 아침부터 효창원 골프장에서 이왕직 차관 시노다(蓧田治策)와 예식과장 이항구(이완용 차남, 남작)가 하루 종일 골프를 쳐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왕직 내부에서도 비난이 나오고 이왕직 장관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항구는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 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것인데 그만한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라는 망언을 했다고 한다. 14) 
   당시 식민지 한국의 상류층 가운데 골퍼들은 늘었지만, 아직 골프 회원들조차도 골프 룰과 에티켓 등에 익숙하지 못한 형편이었고, 퍼팅하는 것도 ‘어린애들 장난 같은 것’이라고 불평하며 퍼팅 없이 플레이하기도 하였다. 15)  
 또한 일부 자료에는 심지어 ‘제대로 된 골프웨어나 골프화가 없어 짚신 같은 것을 신고 웃통을 벗어 제치고 플레이 했다’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당시 사진 자료들을 보면 골퍼들의 모습이기 보다는 캐디들의 모습이 일부 과장되고 폄하된 주장인 듯하다.
 
효창원 골프장 전경 (출처: 『한국골프 100년 : 1900-2000』)
효창원 골프장 전경 (출처: 『한국골프 100년 : 1900-2000』)

   우리에게 『조선골프소사』(1940년) 필자로 알려진 다카하다(高畠種夫)는 효창원 골프장의 모습을 ‘특히 한 여름 오후 소나기 후에는 매미 우는 소리가 귀에 따가웠고 골짜기 개천에 흐르는 많지 않은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수락석출(水落石出)의 경지는 가히 선경(仙境)이었다고’ 언급하면서, 당시 효창원 골프코스에서 라운드 하는 것은 단연코 사치스러운 한량들의 놀이였다고 자평했다. 16)

 다카하다는 1928년에 『골퍼』라는 스포츠잡지를 출간했고,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이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윤호병과 연덕춘의 기억에 따르면 샌드그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일은행 간부였던 윤호병은 청량리 골프장에서 처음 골프를 시작했고 군자리 골프장에서도 라운드를 한 초창기 골퍼였다. 연덕춘 프로는 군자리 골프장 근처에서 살았던 관계로 캐디 일을 하다가 한국의 원조 프로골퍼가 되었다. 17) 
 
   지금 생각하면, 한국 골프 요람기에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엇박자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골퍼 중심으로 골프코스가 만들어지고 골프클럽이 조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식민지 독재 상황에서 만철 부속 호텔의 투숙객 서비스와 외국인 관광객 유인책을 위한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관변 주도로 만들어진 특이한 과정을 겪게 된다.
   어쩌면, 일찍이 <한국골프총람>에서 의미 부여된 것처럼 ‘한국에서 골프의 싹이 자라도록 해준 씨앗을 뿌린 골프장’을 만든 일제 통치기구가 그들의 의도에 따라 근대적 스포츠라 할 수 있는 골프를 한국 상류층에게 고착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1) https://ko.wikipedia.org/wiki/효창공원
2) 『한국골프총람』, 한국문화사, 1973, 39쪽
3) 이정은, 「<매일신보>에 나타난 3.1운동 직전의 사회상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90, 217쪽
4) 『한국골프총람』, 40쪽
5) 『한국골프 100년 :1900-2000』, 대한골프협회, 2001, 70쪽
6) 『한국골프총람』, 42쪽
7) 『한국골프 100년 :1900-2000』, 70쪽
8) 강인구, 「한국 골프 기원설의 몇가지 문제점(3)」, 『골프가이드(현 G.Economy)』, 2019년 9월, 73쪽
9) 『한국골프총람』, 40쪽
10) 손환, 「광복이전 한국골프코스의 발전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체육학회지』 45(4), 2006, 3-4쪽
11)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서울컨트리클럽, 2004, 126쪽
12)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126쪽
13)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121쪽
14) 김대호, 「일제하 종묘를 둘러싼 세력 갈등과 공간 변형」, 『서울학연구』 43, 2011, 11-12쪽 
15) 『한국골프총람』, 45쪽
16)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122쪽
17)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125쪽
 
강인구 연구위원
강인구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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