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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한국 골프 기원설에 대한 몇 가지 문제(2) ...-원산 골프코스에서 누가 공을 쳤을까?

-강인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피서객들 뒷편으로 갈마반도 외인촌 모습-(사진 출처): 셔우드 홀 저, 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

   조계지는 외국인 거류지역을 말한다. 조약항 원산은 1797년 10월에 영국 탐험 항해가 브로턴(W.R.Broughton) 함장이 범선 프로비던스 호를 타고 처음으로 이 항구에 들어왔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국인들은 일찍부터 원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1880년에 일본 상인에게 개항을 했고, 3년 뒤에는 다른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되었다. 원산해관에는 처음에 영국인 세관장 라이트(T.W.Wright)가 부임하였다. 당시 영국인을 비롯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원산은 동북아 동편 해안에서 가장 빼어난 항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항이후 원산에는 일본인 조계지와 중국인 조계지가 만들어졌다. (아래 지도 참조)

개항 초기의 원산항 고지도(사진 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갈마반도에서 가까운 원산만 해안가에 한국인들이 주로 거주했기 때문에 신설된 외국인 거류지는 한국인의 거주 지역보다는 북쪽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쇄국의 빗장이 풀리기는 했지만, 조선정부의 강고한 규제로 말미암아 외국 무역상들은 개항장 이외의 내지 시장으로는 더디게 들어갔다. 고작 개항장으로부터 40㎞ 이내까지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이같은 서양 무역상들의 출현이 조선 말기 수구세력들의 눈에는 ‘영토 침탈’ 쯤으로 비춰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위 치외법권의 최대 수혜자는 내륙 깊숙이 들어가 상주하던 서양인 선교사들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해 미국, 호주, 영국, 캐나다 등지에서 선교사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들 선교사들이야말로 조계지와 내지에서 우리에게 서구적인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원산은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지부였고, 미국 감리교와 공동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지역이었다. 원산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무역과 상업이 활발했으며, 여러 나라 선교회에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던 선교지역이었다.

   대한골프협회의 주장에 따르면,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역민들의 구전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놓고 볼 때 원산해관 골프코스에서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평소에 자국에서 즐기듯 골프를 즐겼다는 것이다. 이 주장도 역시 1940년 골프잡지에 게재된 「조선골프소사」의 서술내용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인들이 어떤 코스에서 어떤 플레이를 했으며, 그들과 어울렸던 한국인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에 골프가 처음 도입됐을 당시 골프를 치는 모습. 까까머리에 고무신을 신은 캐디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사진 출처: 한국골프 100년사-대한골프협회 간)

  한편 골프코스 이용자 문제에 대해서는 원산해관 골프코스의 역사적 의미를 한국 골프코스의 도입과정에 두고 있는 손환 교수나 조상우 교수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 골프코스 도입사를 재정립하고자 한 조상우 교수는 원산해관 골프코스 이외에 구미포 골프코스와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에도 주목함으로써 주변 해수욕장과 함께 외국 선교사들의 휴양지 또는 별장촌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1)  20세기 초 구미포의 소래 해수욕장은 장로교파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만들어졌고, 갈마반도 해수욕장은  미국 남감리교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피서지로 유명해졌는데 우리가 아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이곳이다.
   함경남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한 원산항은 만 끝에 깊숙이 위치하고 있다. 20세기 초 원산항은 크게 2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04년 독일의 한 신문사 기자인 루돌프 차벨(Rudolf Zabel)의 여행기를 보면, 원산항 북쪽 해안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정착한 깨끗한 거류지가 있었고, 500여 미터 떨어져서 남쪽 해안가에 한국인들이 정착한 지저분한 거류지가 있었다. 당시 원산해관은 일본인 거류지와 중국인 거류지 사이에 위치했는데, 서양식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기존 관아로 사용하던 낮은 단층 건물들로서 안에는 작은 마당 정도가 보였다고 한다. 2)
   그리고 한국인 거류지 끝부분에서 북쪽을 향해 길쭉하게 뻗은 땅이 갈마반도였던 것이다. 이 갈마반도 해안 주변에 외국인 선교사들과 주로 경성에서 온 일부 한국인들이 이용하던 여름 피서지가 있었는데, 원산항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두남리라고 불렸다.3)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1910년대 중반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인 피서객들은 원산항 남쪽 부근 갈마반도 해변가를 여름 휴양지로 이용했고, 당시 신문지면을 통해서는 이곳을 갈마반도 외인촌 또는 별장촌으로 명명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지가 될 장소는 자연 경관과 접근성 그리고 경제성 등이 우선 고려 대상이었을 텐데, 1914년경 경원선의 전 구간이 계통되자 7, 8시간 투자하면 경성 샌님도 무더운 여름을 동해 바닷가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좀 나중이긴 하지만, 1934년 출간된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를 보면, ‘갈마반도 외인촌’의 실상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1934년 출간된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한국어판 표지(연세대학교 출판부 간)

“원산시에서 해변으로 몇 마일을 내려가면 동해안에 원산해변으로 알려진 여름 휴양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카츠마(katsuma)로 2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7-8월에 선교사들, 영사들, 사업가들이 그곳에 와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오락을 즐긴다. 그 땅은 1914년에 로스(J.B. Ross)의사, 남감리교 선교회의 터너(V.R.Turner) 목사가 매입하였고, 원산해변협회를 조직하였다. 1915년에 처음으로 별장이 세워진 이래 지금은 50개가 넘는다. 캐나다인들과 남감리교 선교회는 자주 그곳에서 연례모임을 갖는다. 매년 1번 이상 수양회를 개최한다.”4)

   원산 지역에서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로스 박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훌륭한 기독교 신사’라고 칭송을 받았고, 야구, 테니스뿐만 아니라 특별히 골프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5) 갈마반도 해변가 별장촌에는 여름마다 선교회 여름 수양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에 외국인 선교사들과 외교관들 뿐만 아니라 선교회에서 활동하던 한국인들과 경성에서 내려와서 여름 휴가를 즐기던 일부 한국인 부유층도 이같은 휴양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캐나다 선교사 롭(A.F.Robb)도 여름이 되면 원산해변을 찾아 시상을 떠올리며 여가와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열정을 얻는 시간을 만들곤 하였다.

독일 저널리스트 루돌프 차벨이 1904년 조선을 여행하고 쓴 '한국신혼여행' 책자의 한국어판 표지

원산 해변

“여름날은 다시 길어지고,
장마철이 다시 돌아왔다.
겨울 사역을 다시 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열정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좁은 거리에서
우리는 다시 원산 해변을 꿈꾼다.

원산의 언덕이 다시 푸르러지고,
여름 꽃들이 다시 피어오르고,
모래 해변에서,
부서지는 파도는 으르렁거린다.
다시 돌아온 수영객들을 환영하기 위해,
저 먼 선교국에서
배를 타고 차를 타고
우리는 다시 원산 해변으로 왔다.
...“6)

   1925년 7월쯤 원산 갈마반도 해수욕장 주변에는 지금과 같은 시설은 아니겠지만 별장촌과 골프코스를 겸비한 골프리조트형 휴양소가 들어섰고,7)  여름 휴가기간에는 외국인들과 일부 부유층 한국인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휴양지를 찾았다. 1893년부터 내한해서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고, 1916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에비슨(O.R. Avison) 박사도 원산해변을 매력적인 여름 휴양지 중 하나로 회상하고 있다.

 “솔내(황해도 송천)도 휴식을 취하거나 도시의 찌는 열기로부터 피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주말에 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일부 사업가는 서울 근교의 장소가 필요했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경치를 좋아해 두 번째 휴양지가 한국 이름으로 원산, 일본 이름으로 겐산이라 부르는 큰 항구 근처의 동해안에 세워졌다. 별장들이 해수면 바로 위의 모래 위에 세워졌다. 조수 높이는 단지 수 피트였다. 식수는 솔내보다 더 용이하게 구할 수 있었다.... 원산 해변이 동쪽을 향해 있기에 그곳에는 화려한 일출이 있었다. 하지만 솔내의 석양은 없었다. 바다로 돌출된 곳에 있던 솔내는 일출과 석양 모두 있었다. 두 곳에서는 보트 타기와 수영을 할 수 있었지만, 서로 코스가 달랐다. 모두 테니스장, 야구장, 그리고 골프장을 갖고 있었다. 각각은 교회모임과 오락을 위한 별관을 갖고 있었다.” 8)    
 
   이같이 원산 갈마반도 여름 휴양지는 남감리교 선교회를 비롯한 여러 선교회들의 모임과 활동을 위한 장소였다. 특히 원산 해변은 서울 사람들이 여름 휴양지로 좋아했다고 한다. 도시 속 타들어 가는 여름의 메마른 갈증과 식민지적 억압의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위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피난처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시공간적인 정황상 로스 박사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들, 외교관들, 무역상들 그리고 일부 한국인 부유층이 원산 갈마반도 외인촌에 위치했던 골프코스를 이용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강인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참고 문헌>

1)조상우, 정동구, 「한국 골프코스 도입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 『한국체육학회지』, 2012, 31쪽

2)루돌프 차벨 지음, 이상희 옮김, 『독일인 부부의 한국신혼여행 1904』, 살림, 2009. 234-236쪽

3)『매일신보』, 1916년 7월 2일

4)해리 로즈 지음, 쵀재린 옮김,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v.1』 연세대출판부, 2009, 144쪽

5)사우어(C.A.Sauer) 엮음, 『은자의 나라 문에서 : 감리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자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74쪽

6)이현주, 『그 부르심의 길 : 초기 개신교 선교사의 시와 헌신』,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2008, 173-174쪽

7)조상우, 정동구, 2012, 31쪽, 34쪽

8)올리버 R. 에비슨 지음, 박형우 편역, 올리버 R. 에비슨이 지켜본 근대 한국 41년(1893-1935), 청년의사, 2010, 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