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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시선] 포스코, “제지회사인 줄…”

각티슈·종이컵만 남긴 시공사, 책임은 어디에
조합원 신용위기 경고에도 돌아온 건 ‘절차 탓’
조합장은 복귀했지만, 포스코의 태도는 멈춰
기업시민의 언어는 어디까지 공허해졌나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서 포스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콘크리트도, 공정표도, 정상화 로드맵도 아니다. 포스코 로고가 찍힌 각티슈와 종이컵이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포스코가 정릉골에 해준 게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 “각티슈랑 종이컵”이라는 답이 농담처럼 오간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 농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실 자체가 시공사로서의 존재감이 얼마나 옅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입찰 당시 포스코는 안정적인 자금력과 책임 있는 파트너십, ‘기업시민’과 ‘상생’을 강조했다. 그러나 선정 이후 조합원들이 체감한 것은 사업 정상화의 속도도, 갈등을 풀어내는 중재도 아닌 사실상 외면에 가까운 태도였다. 사업은 멈췄고 분쟁은 쌓였지만, 그 과정에서 시공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포스코의 설명은 늘 비슷했다. “조합 내부가 혼란스럽다.” “대표권이 불명확하다.” “절차상 어렵다.” 이 말들은 한동안 상황 설명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설명이 구체적인 도움 요청 앞에서도 반복됐다는 점에서 의미는 달라진다.

 

임동하 조합장은 법원 판결로 직무에 복귀하기 며칠 전, 조합원 400여 명이 이주비 이자 연체로 기한을 넘길 경우 신용불량 등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하며 시공사에 긴급한 협조를 요청했다. 조합원들의 신용 문제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포스코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결국 조합 내부 혼란, 대표권 불명확, 절차상 곤란이라는 기존 설명의 반복에 머물렀다. 조합원들의 신용 위기를 막아달라는 임 조합장의 절박한 호소는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포스코의 태도는 더 이상 단순한 상황 설명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위험이 언제 현실화될지까지 특정된 상황에서도, 시공사는 완충 역할이나 대안 제시 대신 형식적 사유를 나열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후 상황은 분명히 달라졌다. 임 조합장은 법원 판결을 통해 직무에 공식 복귀했고, 그 복귀의 정당성은 세 차례에 걸쳐 사법부에서 확인됐다. 선관위의 당선무효 선언, 임시총회 해임 결의, 반복된 소송 시도는 모두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대표권이 불명확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되기 어려운 상태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임 조합장이 복귀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정릉골에서 포스코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신호는 뚜렷하지 않다. 공식적인 협조 제스처도, 사업 정상화를 위한 가시적 제안도, 조합원들의 부담을 완화하려는 실질적 움직임도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이 같은 무대응이 이어지면서 업계 안팎에서는 “아쉬우면 먼저 와서 몸을 낮추라는 무언의 메시지 아니냐”, “시공사가 주도권을 쥐고 조합을 길들이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온다. 책임 있는 공동사업자라면 이런 인식이 확산되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여기에 비아냥 섞인 현장 목소리도 겹친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이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에 참석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릉골을 비롯한 국내 재개발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그 먼 곳까지는 잘 들리지 않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세계 무대에서의 존재감과 달리, 현장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도, 뚜렷한 신호도 없다는 점이 이런 냉소를 키운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선 칼럼 「“포스코 대부업 진출?”… 비아냥을 듣는 이유」에서 지적했듯, 사업이 멈춘 상황에서도 입찰보증금에 따른 이자 수익은 시공사에 귀속되는 구조는 유지돼 왔다. 반면 이주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 신용도 하락과 금융 불이익을 떠안는 주체는 조합원들이다. 위험은 아래로, 수익은 위로 고정된 구조 속에서 시공사는 여전히 한 발 물러선 자리에 서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릉골 현장에 남은 포스코의 흔적이 각티슈와 종이컵이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 비용이 결국 조합원들의 자금에서 나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는 상생의 제스처라기보다 상생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일부 조합원들은 그 각티슈를 무심코 챙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씁쓸하다. 조합원들은 이주비 이자와 신용 문제로 현실적인 불안을 안고 있는데, 시공사는 가장 값싼 방식으로만 존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포스코는 정릉골에서 시공사였는가, 아니면 각티슈와 종이컵을 조달하는 회사였는가.

 

‘포스코, 제지회사인 줄…’이라는 말은 조롱을 넘어선다. 지금 정릉골에서 시공사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냉정한 평가에 가깝다. 각티슈와 종이컵으로 기억되는 현실이 이어진다면,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공사로서의 명분과 정당성이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정릉골 재개발이 멈춰 있는 이유는 더 이상 설명의 부족이 아니다. 포스코이앤씨 사장단과 실무 책임자 누구도 조합원들의 외침과 언론의 문제 제기에 응답하지 않는 침묵의 구조 때문이다. 이 침묵이 계속된다면, 이는 현장 문제가 아니라 경영의 문제다. 결국 포스코그룹에서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장인화 회장이 움직이지 않는 한, 포스코는 정릉골에서 시공사가 아닌 ‘제지회사’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