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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선 칼럼] 술잔이 사람을 들여다본다-의사가 바라본 술자리에서 만나는 진짜 얼굴

비뇨기과 진료실에서는 사람들의 몸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마음의 상태도 읽어야 한다. 외부 생식기의 크기와 모양, 발기력과 유지시간, 사정시간 그리고 남성호르몬 수치 같은 것들이 그 사람의 건강을 말해준다. 그런데 의사 생활을 하며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의 진짜 성격은 진료실보다 술자리에서 더 잘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병원에서는 대부분 점잖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아픈 곳을 설명한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술자리에서 몇 잔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평소 과묵한 사람이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고, 냉정하던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보면 술은 뇌의 전두엽 억제 기능을 약하게 만든다.

 

전두엽은 인간의 이성, 자제력, 사회적 규범을 담당하는 영역이다. 쉽게 말하면 “이 말 하면 안 되지”, “이 행동은 참아야지” 같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술이 들어가면 그 브레이크가 조금 느슨해진다. 그래서 평소 눌러두었던 감정과 성격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액체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술의 종류에 따라 나타나는 분위기와 주사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1) 막걸리 – 삶이 구수해진다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들은 대체로 털털하다. 애초에 격식이 없는 술이고, 농촌에서 오랫동안 마셔왔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공동체적이다. 비 오는 날 파전과 막걸리가 등장하면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인생으로 넘어간다.

“너나나나 수많은 사연, 수많은 눈물, 똑같은 세상 그리고 똑같은 인생, 얼쑤.”
조금 더 취하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이런 말이 나온다.
“형님, 한잔 하시죠.”

이상하게도 막걸리 자리는 형님과 동생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막걸리 주사의 특징은 대체로 동지애와 인생 철학이다.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야, 우리 다 힘들게 사는 거지 뭐.” 막걸리는 사람 사이의 벽을 빠르게 허무는 술이다.
 
2) 맥주 – 웃음이 많아진다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대체로 밝고 활동적이다.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다른 술보다 경쾌하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고 그냥 시원하면 된다. “캬— 시원하다!” 이 한마디면 행복해진다. 운동 좋아하고, 야외 활동 좋아하고, 떠드는 것도 좋아한다.

 

맥주 취기의 특징은 단순하게 흥분하고 유쾌한 에너지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웃는다. 떠든다. 또 웃는 중에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온다. “야 우리 노래방 가자!” “야 넌 진짜 좋은 놈이야“ 다만 의학적으로 보면 맥주는 이뇨 작용이 강해서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는 단점이 있다.
 
3) 와인 – 어설픈 철학자가 된다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고상한 말이 많아진다. 와인은 마시는 술이면서 동시에 설명하는 술이기 때문이다.

 

“이 향 느껴져요~~~ 라즈베리 같지 않아요?” “아니에요, 이건 토스티한 거죠.”

 

와인 취기의 특징은 지적 대화 욕구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와인 자리에서는 싸우기보다는 논쟁이 많다. “나는 그 영화가 인간 존재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봐.”

 

“아니야, 그건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는 점점 철학으로 깊어진다. 그래서 와인 자리는 종종 새벽까지 이어진다.
 
4) 양주 – 갑자기 회장님이 된다
양주 테이블에는 ‘권위와 과시’가 섞여 있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한다.

 

“이거 30년산이야.”

 

이 한마디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양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힘과 체면’을 의식한다. 그래서인지 양주 취기는 대체로 강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점점 커진다. 처음에는 회사 이야기 그다음에는 인생 이야기 마지막에는 세계 경제 이야기까지 간다. 어느 순간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다 해봤어.” 이것은 양주 취기가 절정에 이른 것이다. 양주는 술이라기보다 자존심의 연료와 같은 느낌이 있다.
 
5) 소주 – 한국인의 감정 저장소이다
한국에서 소주는 특별하다.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감정의 배출구다. 소주잔이 몇 번 돌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점점 깊어진다.
“사실 나 요즘 좀 힘들어.”

 

이 말은 보통 소주 두 병 쯤에서 등장하는 속마음이다. 소주 취기의 특징은 감정의 분출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친구를 끌어안는다. 소주는 한국인의 한(恨)을 가장 담아내는 술이다.

 

술은 사람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드러낸다. 평소 말이 적던 사람이 술 마시고 수다쟁이가 된다면, 그 안에는 원래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강한 사람이 술 마시고 울기 시작한다면 그 안에는 쌓인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술은 단지 뇌의 브레이크를 조금 풀어줄 뿐이다. 그래서 술자리는 때로 인간 관찰의 현장이 된다.
 
필자는 술잔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순간, 술잔이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술잔은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술은 결국 인간을 보여주는 작은 무대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잠시, 조금 더 솔직한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