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은 손으로 수놓는 ‘혼자수’ 이용주 작가가 원작과 같은 사이즈로 수놓은 세계명화 작품 이야기를 전한다.
WRITER 이용주 작가
고흐의 자화상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탕기 영감의 초상을 그린 고흐가 힘겨웠던 1887년 파리 시절의 한 여름날에 그린 작품이다.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그가 존경한 밀레처럼 농촌과 자연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농부처럼 그렸다. 불안해 보이는 눈빛과 깊은 얼굴의 그늘은 고통받는 자신의 내면과 제대로 음식도 못 먹어 좋지 않은 건강상태를 보여준다. |
고흐는 누구인가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쥔데르크에서 태어나 1890년 프랑스 오베르에서 죽었다.
고흐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6세 때부터 화상 ‘구필’의 조수로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일하고 이어서 영국에서 교사로,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로서 일했다. 밀레나 들라크루아의 작품 모사를 했다. 가셰 박사나 시냐크 등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문학사의 서간문학에서도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1880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885년까지 주로 아버지의 근무지인 누에넨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그 시절의 대표작이며, 어두운 색채로 표현한 비참한 주제가 특징이었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1888년 아를에서 타는 듯한 색채의 화풍을 펼친다. 〈해바라기〉, 〈아를의 침실〉, 〈가셰 박사의 초상〉이 있다.
1888년 가을, 아를에서 고갱과 공동체 생활 중 정신병의 발작으로 자기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계속되는 생 레미 요양원에서도 입·퇴원을 되풀이한다. 동생의 권유로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 우아즈로 이전했고, 그해 7월 권총으로 자살했다.
탕기 영감과의 인연
1987년 7월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에 따라 파리로 왔다. 고흐는 16살 때 구필화랑에서 근무할 때 와본 이후로는 처음 찾는 곳이었지만, 목사가 되기 위한 삶을 접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시절이었다. 이 당시 몽마르트 언덕 아래에서 화랑을 운영하던 탕기 영감과도 사귀었다.
고흐를 알아본 탕기 영감
탕기 영감은 고흐에게 늘 ‘앞으로 유명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고흐는 탕기 영감에게 돈을 빌려 쓰기도 했고, 물감도 외상으로 가져다가 쓰기도 했다. 고흐가 죽었을 때도 찾아온 고흐에게는 마음씨 좋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탕기 영감은 액자를 만들고 물감을 팔거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두고 팔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 유행이던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도 탕기 영감이 취급하는 작품이었다. 우키요에는 면과 선 단순채색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던 일본의 목판화다.
그의 가게에는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등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탕기는 자연스럽게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그림을 수집가들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고흐의 작품도 화방에 걸어서 팔아주려고 노력했지만, 한 점도 팔지는 못했다.
죽을 때까지 팔지 않은 초상화
고흐는 화랑에서 일하던 동생 테오를 통하여 탕기를 알게 되었는데, 탕기는 고흐에게 관심을 가져줬고, 고흐는 탕기를 모델로 3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고흐가 파리 시절 그가 추구했던 다양한 색채의 조화를 점묘법으로 구현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림의 배경에는 후지산과 일본 기녀들, 벚나무 등을 표현한 우키요에가 걸려 있다. 배경의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과 탕기의 푸른색 재킷 등 고흐는 이 작품에서 자연의 색을 버리고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구사하고 있다.
탕기 영감은 고흐가 그려준 첫 번째 초상화를 죽을 때까지 팔지 않고 곁에 두었다. 이 그림은 탕기 영감이 죽은 후 로댕미술관에 넘겼다.
비단 실로 수놓아 작품을 표현하는 작가. 1974년 처음 자수를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