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이코노미 이창호 기자 | 소설가 박 인의 소설집 『사랑의 기원』(청어, 2025)은 말보다 문장을, 설명보다 작품 자체를 신뢰하는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설집이다. 책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쓴 문장 그 자체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라는 단호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서문이 아니라, 작가의 문학적 윤리를 압축한 선언이자, 이번 소설집 전체의 기조를 명확히 하는 문장이다. 『사랑의 기원』은 그 태도를 따라,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기는 아홉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 인은 서울 북아현동 산동네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 읽기와 쓰기로 젊은 날을 보냈다. 이후 삶의 무대를 호주와 영국으로 옮겨 족부의학과 헬스케어공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족부 의학자로서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힘썼다. 지난 십여 년간은 소설보다 그림에 몰두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이력은, 그의 문장 속에 살아 있는 관찰의 시선·치유자의 감각·예술가의 결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학문, 의학,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가로지르며 쌓아온 그의 체험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사유와 삶의 결에 자연스레 배어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고요하지만, 그 내부에는 시간이 눌러놓은 무게와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잔향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질적인 듯 보이는 경험들이 한 문장 안에서 정교하게 맞물리며, 그의 소설은 감정의 밑바닥을 조용히 밝혀낸다.
박 인의 문학적 출발은 비교적 늦었다. 2014년 계간 『문학나무』에 첫 단편 「소금 꿈」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스마트소설집 『세 여자 세 남자』, 단편집 『말이라 불린 남자』, 『누님과 함께 알바를』, 장편 『포수 김우중 – 부북기』 등을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차곡차곡 구축했다. 『사랑의 기원』은 그간 발표한 단편들을 정제해 묶은 작품집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영(靈)을 만나서」, 「소리의 아버지」, 「다시, 봄」, 「녹주」, 「판라꾸」, 「김산을 따라서 전진」, 「수안」, 「구두 한 켤레」, 「후추나무」 등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했다. 각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인물과 배경을 품고 있지만, 하나같이 ‘삶을 건너는 존재들의 작은 떨림’을 포착한다. 작가는 사랑의 기원이든 상처의 기원이든 그것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이 품은 미세한 슬픔과 오래된 기억의 떨림을 바라보게 하며, 독자가 스스로 그 ‘기원’을 더듬도록 이끈다.
작품 전반에는 그의 회화 감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색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회화 작업처럼, 그의 소설은 감정을 한 번에 터뜨리지 않고 차분히 축적한다. 인물들은 말을 아끼고, 사건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오랜 시간 눌려 있던 무게가 깊게 자리한다. 그 무게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방식은 박 인이 살아온 체험, 관찰, 사유의 시간이 만들어낸 고유한 문학적 리듬이다.
소설집 끄트머리에는 황유지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다. 황 평론가는 박 인의 소설을 “이토록 보드라운 복수, 그 위무의 기원”이라 표현한다. 날카롭지 않고, 과장되지 않고, 부드러우나 결코 약하지 않은 감정의 방식. 이것이 바로 박 인의 문장과 인물들이 독자에게 건네는 정서다. 그의 인물들은 폭발 대신 침묵을, 단절 대신 회귀를, 심판 대신 이해를 택한다. 상처를 되짚는 과정이 곧 자기 위무가 되는 것—그 보드라운 태도 자체가 문학적 복수로 읽힌다는 표현은 박 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정밀하게 짚어낸 해석일 것이다.
『사랑의 기원』은 목소리가 높지 않은 소설집이다. 그 음전한 문장 속에 독자들이 자기 삶의 기원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홉 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우리는 무엇에서 비롯해 살아 가는가”에 수렴한다. 박 인의 선언처럼, 그는 여전히 작품으로 말한다. 『사랑의 기원』은 작가의 문장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기원’을 더듬어보는, 잔잔하고도 단단한 문학의 공간이다.
『사랑의 기원』은 크게 소리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문장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책은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내면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다. 박 인의 문장이 가진 힘은 그 거울을 통해 삶을 조용히 회복시키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소설집에서 다시 건네는, 오래된 기원의 문장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