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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최초의 골퍼 〈월터 하겐〉 (상)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21살에 US 오픈 챔피언에 오르고, 메이저 11승을 달성한 천재. 토종 미국인 최초로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에 오른 인물이자, 프로골퍼의 클럽하우스 출입 금지라는 차별적 제도를 고쳐버린 골프 역사를 만든 장본인.

 

1시간 당 10센트를 받는 캐디로 시작해 최초로 100만 달러의 수입을 돌파해버린 골프계 자수성가의 표본. 미국 골프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골퍼.

 

이 모든 수식어가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버린 최초의 골퍼, 월터 하겐에 대한 것이다. 그를 알아야 진정한 프로골프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월터의 첫 경험
월터 하겐은 1892년 12월 21일 미국 뉴욕 브라이튼에서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난다.할아버지 대에 독일에서 이민 온 하겐의 일가는 노동으로 생업을 꾸렸으며, 월터의 아버지 윌리엄은 대장간의 노동자였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하면 평범한 수준의 생활을 하기에는 빠듯하게나마 수입이 보장됐다.


하겐이 처음 골프채를 잡은 건 5살 때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가까운 골프 클럽에서 일하는 샌디가 방문 선물로 장난감용으로 짧게 만든 골프채 한 개를 가져온 것이다. ‘전설’이 시작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월터는 60년이 지난 뒤에도 그날 밤 골프채를 받고 거실에서 공을 친 ‘첫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8살의 캐디
샌디가 일하는 로체스터 컨트리클럽(Country Club of Rochester)는 1895년 개장한 프라이빗 골프장이었다. 인근의 부자들이 모여 그저 재미로 ‘명랑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월터는 7살 때, 그러니까 장난감 골프채를 받은 지 2년이 지났을 즈음에야 골프라는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물론 집 앞 개울을 건너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서야 목격한 광경이었다. 8살이 되기도 전에 월터는 시간당 10센트를 버는 캐디 일을 시작한다.

 

센스만점 월터
캐디를 시작한 첫날, 월터는 한 멤버의 백을 메고 나갔다가 10번 홀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겪게 된다. 깊은 러프에 떨어진 볼을 찾지 못하자, 화가 난 멤버는 “내 공을 찾을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말라”면서 자기 백을 메고 가버린 것이다. 어린 월터가 아무리 러프를 뒤지며 찾아도 볼은 보이지 않았다.


월터는 생각을 거듭하다 벌렁 눕고는 러프 위로 구르기 시작했다. 한참 구르다 등에 걸린 볼을 찾아 멤버에게 달려간 월터, 볼을 찾은 과정을 들은 멤버는 “앞으로 잘 배우면 좋은 캐디가 되겠어!”라고 칭찬하며 팁도 5센트나 줬다. 월터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참을성이 강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캐디로서 능력은 제곱으로 쌓이는 게 당연했다.


주운 채로 풀세트를 구성하던 아이
캐디 일을 하면 할수록 골프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도 강해졌다. 실력이 좋은 멤버의 캐디를 맡으면 스윙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가 집에 와서 흉내를 내곤 했다.

 

다행히도 월터에게는 어렸을 적 샌디가 선물한 골프채 하나가 있지 않은가. 물론 캐디는 라운드를 할 수 없었기에 들판에 혼자 나가서 하는 연습이 다였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클럽 멤버가 낡은 2번 아이언과 3번 우드를 월터에게 선물했다. 월터는 무릎을 탁! 쳤다. 이후 멤버들이 버리는 녹슬거나 샤프트가 휘어진 골프채를 하나하나 주워 모아 ‘풀세트’를 구성해 나갔다.


쑥쑥 늘어가는 골프 실력
7학년이 되던 해, 월터는 학교를 포기하고 골프의 길을 걷기로 한다. 13살이 된 월터는 헤드 프로였던 앤드류 크리스티의 도움으로 골프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골프에 대한 열망과 꿈은 커졌다.

 

정식 레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월터는 실력 있는 멤버들의 스윙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런 월터를 지켜보던 클럽 멤버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골프 코스에서의 ‘진짜’ 라운드를 허락했다.


14살이 되던 해, 크리스티는 월터를 자기의 보조로 채용했다. 이제 월터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게 됐다. 그간의 열정이 컸던 만큼 월터의 연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터는 5살 많은 형들과 시합해도 그게 누구든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듬해 15살이 되자 20세 이하의 골퍼 중에서 자기보다 연습을 더 많이 한 선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야구를 하고 싶었던 골프 천재
18세가 된 월터 하겐은 직업으로 골프를 택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야구였는데, 그는 야구에 큰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터는 오른팔과 왼팔을 바꿔가며 던질 수 있는 양손 투수였다.


15살 때부터 로체스터 램블러스라는 야구팀의 선수로 활약했는데, 그는 입단한 이후 3회 연속으로 램블러스를 로체스터시의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월터의 부모는 야구도, 골프도 반대했다. 그들은 아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바랐다.

 

17살이 된 월터는 키 179㎝, 몸무게 80㎏의 건장한 체격으로 성장했다. 월터의 아버지는 단신이었지만, 남편보다 키가 컸던 어머니의 키를 닮았던 것이다. 대신 아버지에게는 힘세고 큰 손을 물려받았다.

 

인생을 바꿔준 연습 라운드
부모의 바람대로 월터는 자동차 수리, 만돌린 제조업체, 동물 박제 제작, 피아노 생산 회사 등에서 견습으로 일을 해 봤지만, 햇살 가득한 오후의 골프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월터와 동갑인 골퍼 존 맥더모트의 1911년 US 오픈 우승 스토리가 월터를 자극했다.


월터를 보조로 채용해준 헤드 프로 크리스티는 1912년 US 오픈에 참가할 준비 중이었다. 월터가 자기도 참가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아직 기량이 부족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근처 골프장 헤드 프로인 캠벨과 함께 US 오픈이 열릴 코스로 연습 라운드를 가면서 월터를 데리고 갔다. 연습 라운드 결과 월터는 73타를 치며 두 헤드 프로를 이겼다. 이를 본 크리스티는 US 오픈이 끝난 후 토론토에서 열릴 캐네디언 오픈에 월터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변변한 아마추어 시합 경험도 없던 월터에게 프로대회 출전 기회, 그것도 외국에서의 대회 출전이란 꿈만 같은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월터는 11위를 기록했다. 훌륭한 성적이었음에도 월터는 크게 실망했다.

 

 

STRANGE WEAPONS made by Walter

프로의 보조로 일하던 월터는 골프채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기술을 배웠고, 그린 관리하는 일도 눈여겨보게 됐다. 월터는 자기가 직접 사용할 클럽 세트를 정성껏 만들었고 ‘스트레인지 웨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월터만의 이 클럽 세트는 US 오픈을 2번이나 차지하게 해줬고, 훗날 이 세트는 골프 명예의 전당에 기증됐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잘해야
얼마 뒤 크리스티가 다른 클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는 후임으로 월터를 추천했고, 평소 좋은 관계를 맺어온 클럽 멤버들은 월터에게 연봉 1,200달러와 시간당 레슨비 2달러로 헤드 프로직을 제안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월터에게는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는 망설였다. 헤드 프로는 무척 바쁜 직업이었고, 프로대회에 참가하려면 멤버들의 허가가 필요했기에, 그가 원하는 만큼 대회에 참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러나 결국 월터는 안정적인 헤드 프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친구인 조지를 어시스턴트로, 아버지 윌리엄을 그린 키퍼로 함께 고용했다.


드디어 US 오픈
1913년 월터는 드디어 US 오픈에 참가하게 된다. 시합 장소인 ‘더 컨트리 클럽’에 도착한 월터는 라커룸에서 만난 동료 선수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내 이름은 월터 하겐, 영국인들로부터 US 오픈 우승컵을 지키려는 미국 프로골퍼를 돕기 위해서 왔다.”


어린 무명 프로의 소개를 들은 전년도 우승자 존 맥더모트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박장대소했지만, 월터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월터는 이때 출전한 해리 바든의 모든 행동과 스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번 대회는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바든의 테크닉을 배울 수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바든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클래식 스윙 얘기다. 어드레스와 그립, 특히 스윙 리듬을 배우려고 애썼고, 피니쉬 자세에서 오른쪽 어깨가 목표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멈추는 점을 흉내 내려고 했다.

 

월터가 8살이던 1900년, 영국의 골프 영웅 해리 바든이 미국을 방문했다. 이미 브리티시 오픈을 세 차례나 제패한, 당대 최고의 골퍼였기에 미국 골퍼들의 기대와 관심은 뜨거웠다.
2월에 도착한 바든은 몇 달간 미국을 돌며 시범 경기로 돈을 벌어들였다. 10월 시카고 골프 클럽에서 열린 US 오픈에서 우승한 바든은 영국으로 돌아가며 이런 인터뷰를 했다.
“미국 골퍼들의 기량은 아직 영국과 비교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실제로 ‘토종 미국 골퍼’가 US 오픈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굳이 뜸들이지 않겠다. 바로 그 토종 미국 골퍼가 월터 하겐이다.

 

‘위멧이 왜 거기서 나와?’
시합 중에 평소 하지 않던 스윙을 따라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남의 스윙을 흉내 내는 데는 이미 도가 튼 월터 아니겠는가. 실제로 월터는 라운드 중간에도 바든의 스윙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월터는 9홀이 끝나면서 선두에 나서기도 했지만, 14번 홀 (파5)에서 버디를 노리다가 통한의 더블보기를 범해 307타, 4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첫 참가한 US 오픈에서 4위를 한 월터의 성적도 대단했지만, 1913년 US 오픈은 20살의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이 디펜딩 챔피언 존 맥더모트, 세계적인 아이콘 해리 바든, 괴물 장타자 테드 레이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빛이 바랬다.


‘그래, 결심했어! MLB로 가자!’
1913년 US 오픈이 끝나고 몇 달 뒤인 12월, 21세의 월터는 여전히 야구에 미련이 남았다.

 

골프든 야구든 한 가지 길을 택해야 할 때였다. 월터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플로리다 전지훈련 캠프로 직접 찾아갔다. 팀 매니저 팻 모런에게 배팅 능력과 피칭 능력을 시험받았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배팅은 인정받았지만, 오히려 장점이던 피칭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양팔을 모두 쓸 수 있는 스위치 피처라는 건 장점이었지만, 제구력 면에서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기엔 아쉬웠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팻 모런은 “좀 더 연습한 뒤 내년에 외야수나 1루수 쪽으로 지원하라”고 제안했고, 월터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게 됐다. 야구도 골프만큼 연습한다면 틀림없이 메이저리그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월터가 야구라니! 야구선수라니!’
다음 해인 1914년 7월 어느 날, 월터의 마음은 야구 쪽으로 기울었던 때였다. 그날도 자신의 프로샵에 놀러 온 친구와 야구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로체스터CC에서 영향력이 있던 멤버 윌라드가 골프클럽을 찾으러 월터의 프로샵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클럽을 찾으면서 월터와 친구의 대화를 듣게 된다.


“올해 시카고에서 열리는 US 오픈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그럴 거야. 난 이제 야구 연습을 해야 하니까.”
윌라드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원은 못 참지
“월터, 자네는 우리 골프장을 대표하는 프로이고, 작년 US 오픈에서도 4위라는 성적을 올렸는데 골프를 포기할 수 없지 않나? 이번 시카고에서는 우승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자네가 이번 US 오픈에 참가하기만 하면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네. 옆에 있는 친구의 비용까지도 부담하지.”


월터는 기뻐하며 곧바로 US 오픈 참가 신청서를 보냈다. 문제는 월터의 연습 부족이었다. 그간 시간 날 때마다 야구 연습만 했던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몇 주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다시 골프채를 잡은 월터는 열심히 시합을 준비했다.


‘아, 여기가 아니었어?’
이윽고 1914년 시카고 미들로디언 골프클럽에서 US 오픈이 열렸다. 이때 USGA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만 클럽하우스의 라커룸을 개방했다. 프로선수들은 별도로 마련된 라커도 없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 룰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월터는 스스럼없이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를 본 다른 프로 몇 명도 의아해하며 따라 들어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USGA는 별수 없이 클럽하우스를 모든 프로선수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월터는 훗날 미국의 모든 클럽하우스를 프로들에게 개방시킨 주인공이 된다.

 

어린 월터가 캐디와 헤드 프로 보조를 하던 당시, 헤드 프로는 멤버들에게 레슨을 하고, 골프 샵 운영권을 가지며, 골프채를 팔거나 수리하는 일들로 수입을 만들었다.
부유층인 골프장 멤버들은 헤드 프로를 운전기사나 심부름꾼 정도로 여겼다. 당연히 프로들의 클럽하우스 출입은 금지됐다. 부득이 들어가야만 하는 경우라면 직원 전용 뒷문을 이용해야 했다. 어린 월터에게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보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뜻대로 되면 그건 인생이 아니지
예선 36홀을 152타 5위로 통과한 월터는 본선 시합 전날 저녁, 친구 더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시카고 시내로 나갔다. 랍스터와 굴이 전시된 식당을 발견하고, 평생 처음으로 랍스터를 먹기로 한 두 사람은 배가 터지도록 랍스터를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여기서 사단이 났다. 잠자리에 들었던 월터는 복통을 느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복통이었다. 친구 더치는 호텔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식중독 약을 구해왔다. 그러나 복통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다음날 시작되는 36홀 경기에 참가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야구 연습 대신 다시 시작한 골프였다. 거기다 클럽 멤버 윌라드의 후원과 지지를 생각하면 시작도 못 해보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일어서 경기장에 나간 월터, 그러나 연못을 넘겨야 하는 1번 홀 티샷부터가 난관이었다.

 

월터는 혼신의 힘을 다해 클럽을 휘둘렀지만, 도저히 넘길 자신이 없었다. 1914년 US 오픈 본선 36홀이 시작된 날 아침. 복통으로 일어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월터는 어떤 심경으로 1번 홀 티샷을 쳤을까.


하편에서 계속.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박노승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