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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한계 극복한 조막손 단신 장타자의 비밀이 이 그립이라고?

골프 역사를 되짚어보는 '백스토리 시리즈' 진 사라센 〈중〉

딱 스무 살이 되던 해, US 오픈과 PGA 챔피언십 동시 석권. 사상 최초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 165㎝의 단신이었지만 최고의 장타자로 인정받고, 자신의 약점인 벙커 플레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샌드웨지를 발명해 버린 남자. 유진 사라체니라는 본명이 골프선수답지 않은 것 같아서 골프를 본격적으로 치기도 전인 열여섯 살에 이름을 바꿔버린 설정 마니아, 진 사라센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EDITOR 박준영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박노승, 도서출판 충영)

 

 

개천 최고의 아웃풋
1922년, 스무 살 무명의 사라센이 2개의 메이저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해다. 언론은 ‘1913년 위멧 이후 가장 놀라운 우승!’이라고 보도했다.


위멧은 영화 ‘내 생애 최고의 경기(2005)’에서 그려지듯 골프 사상 최초의 개천 출신의 ‘용’이다. 다시 말해 사라센이 출현하기 전까지 ‘개천’ 최고의 아웃풋은 프란시스 위멧으로 공인(?)돼 있었던 모양이다.


사라센도 ‘개천’ 출신이었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이었고(물론 출생으로 보면 뉴요커다), 일개 캐디 출신이었으며, 겨우 스무 살이 된 골퍼였다. 피지컬마저 작은 편이었다. 체구가 작은 건 둘째 치고, 손이 작았다. 그래서 많은 프로들이 사라센이 대성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립이다.
그립을 마스터한다면 스윙의 75%는 해결된다” (진 사라센)


작은 거인 여기도 있다
스포츠에서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은 종목을 막론하고 늘 존재하는 것 같다. 피지컬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는 언제나 팬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농구에 아이버슨의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은 지금도 피지컬이 스포츠의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사라센은 골프계의 작은 거인이었다. 별명처럼 단신이지만 비거리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비거리의 비밀은 인터로킹 그립
사라센은 손마저 조막손이었다. 골프에서 손이 크다는 건 생각보다 더 유리한 신체적 조건이다. 실제로 사라센 본인도 대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강하고 큰 손을 꼽았다.

 

그럼 사라센은 어떻게 작은 피지컬로 비거리를 압도할 수 있었을까. 비밀은 바로 인터로킹 그립이었다. 오버래핑 그립으로 드라이버를 칠 때보다 20~30야드는 족히 더 보냈다. 특이한 건 풀스윙은 인터로킹 그립을, 그린 주변 칩 샷이나 피치 샷에서는 ‘바든 그립’을 썼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골퍼는 바든 그립을 쓴다. 그런데 막상 역대 네임드들은 인터로킹을 잡는다. 누구냐고? 프란시스 위멧, 사라센, 잭 니클라우스 그리고 타이거 우즈다.

 

 

그립이 스윙의 75%를 좌우한다
사라센은 스윙을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립이라고 생각했다. 그립이 틀리면 결코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고 믿었고, 그립을 마스터한다면 스윙의 75%는 해결된다고 말했다. 사라센은 또 올바른 그립을 잡으면 코킹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그래서 윌슨에서 스폰서십을 맺을 프로선수를 고를 때도 그립이 틀린 선수는 뽑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사라센은 체구도 작았지만, 손이 유독 작았다. 그의 작은 손을 본 프로들은 “사라센은 절대 대 선수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인터로킹 그립이다. 오버래핑 그립으로 드라이버를 칠 때보다 20~30야드의 비거리 차가 났다.


뭐? 나보고 Hey, Kid?!
다시 우승 얘기로 돌아가서 1922년 사라센의 우승이 끼친 영향력은 개인의 성공에서 그치지 않았다. 많은 평범한 가정의 사람들에게 골프가 결코 부자나 영국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다.


신데렐라처럼 한순간에 스타덤에 오른 사라센은 특히 선수들 사이에서 ‘저항’을 받았다. 이른바 ‘안티-사라센’ 파들이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사라센의 자존감은 높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당대의 골프 아이콘이자 모든 골퍼의 영웅, 월터 하겐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을 정도다. 골프 영웅 하겐을 꺾고 새로운 1인자가 나타났음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사라센에게 남들의 시기나 질투 같은 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런 사라센도 월터 하겐이 비록 자기보다 10살 더 많다지만 다른 선수를 부를 때는 ‘Boy’라고 하면서 자기한테만 ‘Kid’라고 하는 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라센의 전투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범 안 무서워하는 건 역시 하룻강아지
사라센의 발칙한(?) 경쟁심을 읽었을까. 흥행사들이 ‘월드 골프 챔피언십’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센과 월터 하겐의 72홀 매치 플레이를 준비했다. 오크몬트와 뉴욕의 웨스트체스터-빌트모어에서 각각 36홀씩 플레이하기로 됐다. 총상금 3천 달러, 승자가 2천 달러를 가져가는 내기 골프였다.


사실 하겐은 매치 플레이의 달인으로 졍평이 나 있었다. 골프를 잘 치는 건 물론이고, 심리전까지 능했다. 실제로 월터 하겐은 시합에 들어가기도 전에 상대의 기를 죽여 제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라센에게도 심리전 공격은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하겐이 보기에 사라센은 그저 하룻강아지였을 터다. 사라센은 정말로 하룻강아지였다.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 오히려 하룻강아지니까.

 

 

하겐과의 1:1 매치
백만장자 이상으로 옷을 잘 입는다고 소문난 하겐을 맞아 일단 양복 2벌을 새로 맞추고 셔츠와 골프화도 새로 샀다. 시합이 시작되고 하겐보다 15㎝가 작은 사라센이 드라이버 비거리로 하겐을 찍어댔다. 사라센은 진짜배기였다.

 

물론 아이언 샷부터는 관록의 하겐이 약관의 사라센을 능가했다. 첫날 36홀 결과 하겐이 2홀 차로 앞섰다. 그러나 둘째 날, 세 번째 18홀이 끝났을 때 사라센은 역전에 성공하며 1홀 앞서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점심을 먹으려는데 속이 메스꺼운가 싶더니 곧 식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 1:1 매치, 그것도 하겐과의 매치에서 시합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사라센은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했다. 총 72홀 중 70번째 홀에서 사라센이 3:2로 승리하며 시합을 끝냈다. 그날 밤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된 사라센은 수술실로 실려 가야 했다.


‘공부 좀 더 할걸…’
새로운 챔피언은 백악관을 비롯해 많은 모임과 파티에 초대받았다. 이야기의 주제가 골프일 때 사라센은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했지만, 골프 외의 주제로 바뀌면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골프 말고는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걸 깨달은 사라센은 학교 공부를 너무 일찍 포기한 걸 후회했다. 골프를 잠시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 기본적인 교양과 상식을 배워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골프 챔피언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포기했지만.


대신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광고 계약이 줄을 이었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75년이나 이어진 ‘윌슨’ 사의 스폰서십도 이때 시작됐다. 잠시 시간을 뛰어넘자면, 1922년 첫 우승 후 6년이 지난 1928년 디 오픈 즈음, 사라센은 명실상부 하겐의 최대 라이벌이 된다.


슬럼프의 원인은 ‘잘못된 그립’
그런 사라센도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1924년 무렵이었다. 이미 그는 메이저 3승의 골퍼였지만, 이따금씩 투어에서 우승은 했지만 ‘챔피언’의 골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조크 허치슨이 구사하는 페이드 구질을 배우려고 하면서 슬럼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프로들도 특히 스윙을 바꾸려고 할 때 슬럼프가 오기 쉽다. 페이드 샷을 연습하던 사라센은 자신의 본래 스윙을 잊어버리게 됐다.


그는 스윙이 불안정해진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는데 수많은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얻은 결론은 ‘잘못된 그립’이었다. 백스윙 톱에서 오른손이 클럽을 단단히 잡지 않고 느슨해진다는 걸 느꼈다. 스윙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와 약지가 모두 그립을 단단하게 잡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왼손은 4개의 너클이 모두 보일 정도로 돌려 잡는 스트롱 그립을 개발했다.


그는 평소 쓰는 드라이버 무게의 두 배가량 되는 연습용 드라이버를 만들어 스윙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악력을 기르고 오른손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윌슨의 신제품 ‘리마인더 그립’이 도움이 됐다. 이 그립은 손바닥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표시를 한 그립이었다. 사라센은 모든 클럽의 그립을 교체했다. 새로운 그립과 연습의 효과는 1929년 대회부터 성적으로도 나타났다.

 


샌드웨지의 발명가, 사라센
현대의 샌드웨지는 1931년 사라센이 고안했다. 그의 약점인 벙커 플레이를 보완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웨지의 바닥 부분을 둥그렇게 튀어나오도록 만들었다.

 

벙커에서 리딩 에지보다 바운스가 먼저 모래에 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닥이 모래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나가도록 설계했다. 클럽을 직접 기계로 깎아 가면서 벙커에서 수천 개의 공을 쳐봤다.


1년간 최적의 바운스를 찾기 위해 벙커와 작업실에 살다시피 한 그는 이듬해인 1932년 완성품을 만들어 냈다.


그는 남들 몰래 그 클럽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사라센은 ‘비밀 무기’와 함께 어떤 벙커, 어떤 라이에서도 깃대를 향해 볼을 칠 수 있는 비법을 터득하게 됐다. 같은 해 사라센은 디 오픈에서의 첫 승을 거뒀다.


한편 골프채 제조사이자 사라센의 스폰서였던 윌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R-90라는 이름으로 사라센의 사인이 들어간 웨지를 출시했고 첫해에만 무려 5만 개의 판매고를 올린다. 앞서 언급했듯 윌슨은 사라센이 타계한 1999년까지 무려 75년간 그와의 스폰서 계약을 유지했다.

 

 

데뷔 직후 시작된 슬럼프, 9년 만에 탈출하다
우여곡절 끝에 1932년이 왔다. 경제 불황으로 그간 모은 재산을 거의 모두 잃은 사라센이 재기할 방법은 골프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는 것뿐이었다. 수식할 것도 없이 그저 ‘더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았다. 우승하지 못하면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졌다.


비밀 병기 샌드웨지를 백 속에 감춘 사라센이 브리티시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여객선에 올랐고, 그는 이 대회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한다. 무려 9년간의 슬럼프였다. 지금은 레전드가 된 사라센이 ‘반짝 스타’ 정도로 남을 뻔했다.


그런데 이 우승은 명 캐디 ‘스킵 대니얼스(Skip Daniels)’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는 사실 이전에 하겐의 캐디였던 인물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