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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센티 흙수저 단신 장타자..서민들의 빛이 되다, 진 사라센 <상>

골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진 사라센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스무 살에 메이저 대회 2개를 제패한 골퍼. 작은 키에 그렇지 못한 장타를 뿜어내며, 자신의 약점인 벙커샷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의 샌드웨지를 발명한 골퍼. 그런데 그의 원래 이름은 유진 사라체니였다.

 

EDITOR 박준영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박노승 지음

 

 

진 사라센은 스무 살이 되던 해, 데뷔하자마자 US오픈과 PGA챔피언십을 동시에 석권해버린 사라센은 당대 골프계의 아이콘과 같던 월터 하겐을 위협하는 라이벌로 급부상한다.

 

역사상 최초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그는 97세까지 골프 선수로, 해설자로, 원로로 행복하게 살다 갔다. 야구계의 격언처럼 ‘골프는 벤 호건처럼, 인생은 사라센처럼’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사라센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나는 골프왕이 될 거니까”
그는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진 사라센의 부모 사라체니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뉴욕시 북쪽 해리슨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미국의 건설 붐으로 목수의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민을 결정했다.

 

사라센의 부모인데 왜 성이 사라체니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사실 진 사라센의 본명은 유진 사라체니(Eugene Saraceni)였다.


1918년, 사라센이 그가 16세였던 시기였다. 당시 사라센은 프로 골퍼를 진로로 결정했었고, 근처의 9홀 퍼블릭 골프장(Beardsley Park)에서 연습할 수 있게 됐다. 사라센의 재능을 인정해준 티칭 프로, 알 시우시(Al Ciuci) 덕분이었다. 그는 PGA 투어 경험이 있고 주니어를 잘 가르치는 티칭프로였다.


어느 날 알과 그의 동생 조, 사라센이 함께 라운드를 했다. 이날 사라센은 145야드 파3 홀에서 생애 첫 홀인원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차례인 알 시우시도 연이어 홀인원을 한 것.


라운드 후 시우시는 지방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이를 기사화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날 아침, 짤막한 기사가 실렸는데 사라센은 이 기사를 몇 번이나 소리 내 읽더니 ‘내 이름의 발음이 골퍼의 이름으로는 좋지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이 일로 사라센, 아직은 유진 사라체니였던 그는 알파벳을 여러 방법으로 조합하면서 새로 사용할 이름을 연구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한 이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Gene Sarazen’이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사라센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음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누구든 개명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지 않은 고민을 하겠지만, 시쳇말로 ‘극한의 컨셉충’의 면모를 보인 일화가 아닐까. 이 일화를 통해 진 사라센에게 묘한 애정이 생겼다. 가난한 상황에서,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지도 모를 자신의 도전에 그만한 확신이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수완 좋은 꼬맹이
사라센은 1902년생이다. 사라센의 위로는 누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당연히 목수로 키울 생각이었다. 가업이니까. 사라센은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역에 나가서 좋은 자리를 골라 신문을 파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공부보다는 돈벌이에 관심이 많았다. 고철 줍기, 신문팔이, 과일 따기, 심부름하기 같은 소일거리였지만, 그가 돈을 벌어 오는 한 아버지는 간섭하지 않았다.


하루는 이웃이 그의 집에 놀러 왔는데 그의 아들 프레드가 ‘부자들이 모여 작대기로 공치기 놀이’를 하는 큰 놀이터(라치몬트CC)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듣게 된다. 어린아이들도 가서 그 작대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돈을 줘서 프레드의 동생 대니도 거기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8살의 사라센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단숨에 대니를 만나러 뛰어갔다. 사라센보다 1살 많은 대니는 사라센에게 “우리 형이 너한테 일을 줄 수 있을 거야”라면서 다음날 캐디 일을 하러 나가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날 밤 사라센은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아침이 되기만 기다렸다.

 

프레드는 9홀 골프장의 프로 겸 캐디 마스터 겸 그린 키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 대니는 사라센에게 캐디 교육을 해줬다. 가장 어려운 건 골프클럽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사라센의 눈에 모든 아이언 클럽들은 거의 똑같이 생겨 보였으니까.


오후가 되고, 드디어 사라센이 처음으로 캐디를 하게 됐다. 프레드는 처음이니 대니와 함께 일을 하도록 배려했다. 대니의 눈치를 보며 한 라운드를 겨우 마친 사라센의 손에는 캐디피 25센트와 팁 20센트, 총 45센트가 들려있었다. 살면서 가장 큰돈을 하루 만에 번 것이었다.

 

사라센은 기쁨, 아니 환희로 벅차올랐다.

 

 


 

사라센도 시작은 오잘공
캐디 일을 하던 사라센이 골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자연스러웠다. 어떻게든 공을 한번 쳐 보고 싶었다. 그러나 캐디는 공을 쳐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어느 날 사라센은 동료 캐디에게 담당 손님의 드라이버를 건네준 뒤 먼저 페어웨이로 향했다. 손님이 티 샷을 하고 걸어오는 사이에 몰래 공을 쳐볼 심산이었다. 손님들이 티샷을 마치고 걸어오는 사이 사라센은 재빨리 공과 아이언 클럽을 뺐다. 심호흡을 한 뒤 그린을 향해 생애 첫 샷을 날렸다. 샷은 완벽했다. 깃대를 향해 똑바로 날아간 공은 홀 근처 2m 거리에 멈췄다.

 

이미 골프를 치고 있는 우리도 이런 샷이 나오면 방방 뛰고, 한동안의 안줏거리로 삼을 텐데 사라센이라고 별수 있었을까. 흥분한 사라센은 규칙도 잊은 채, 손님에게 자기 샷을 자랑했다. 손님은 고개를 저었다.

 

“규칙대로라면 나는 지금 바로 널 돌려보낼 수도 있지만, 일단 라운드를 다 끝내고 프레드에게 이 상황을 얘기할 것이다. 네 처분은 그가 결정할 일이니까.” 다행히 프레드는 사라센에게 따끔하게 경고를 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그 샷을 칠 때의 ‘손맛’은 사라센이 평생친 모든 샷 중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된다고 말한 인생 최고의 샷이 됐다.

 

이 정도면 오잘공이 아니라 인잘공인가.

 

첫 대회 성적은 105타
1913년, 라치몬트에서 3년의 캐디 생활을 한 사라센이 11살이 됐다. 그는 18홀의 명문 클럽인 애퍼와미스로 이직했다.

 

그곳의 멤버들이 모두 부자들이라 캐디 수입도 훨씬 더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센은 캐디 번호 99번 배지를 받았는데 3주 동안 일을 받지 못했다. 캐디 마스터가 캐디를 호명할 때마다 98번까지 부른 뒤 99번은 건너뛰고 100번을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드디어 사라센의 99번이 불렸고, 조지 켄트라는 멤버의 백을 메게 됐다. 왜 캐디 마스터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걸까. 이 멤버의 별명은 ‘No Tip Kent’였다. 팁을 주지 않기로 소문이 나버리자 그 멤버가 나타나면 캐디들은 숨기까지 했다. 남아 있는 건 99번의 사라센뿐이었다. 그래도 사라센은 기뻤다. 무려 3주 만에 처음으로 코스에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1913년은 캐디 출신 아마추어 선수 프랜시스 위멧이 영국의 해리 바든을 물리치고 US오픈 챔피언이 된 해다. 캐디를 값싼 노동력 정도로만 생각하던 골프클럽들은 이 우승을 보고 장래에 캐디 출신 챔피언이 또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라센이 속한 애퍼와미스도 마찬가지였다. 캐디들을 위한 골프대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사라센은 학교도 가지 않고 캐디 골프대회에 나갔다. 생애 첫 샷이 홀 2m 옆에 붙이는 샷이었던 사라센이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으니 사라센은 어마어마한 실력으로 무대(?)를 뒤집어놓으셨을까. 꼴찌였다. 기록은 105타였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베테랑 캐디들과 어울리며, 유명한 아마추어 선수들의 캐디를 하곤 했다. 역시 자식과 골프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한 기업인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의사의 강력한 당부 ‘오히려 좋아!’
1917년 겨울, 미국도 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정부에서는 군인을 모집했다. 사라센도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입대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저녁 사라센의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계 사정이 어려워져 가족 모두가 일해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라센과 누나도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사라센은 캐디 일을 중단하고 아버지와 함께 목수 일을 하러 나갔다.


목수들에게 못을 날라다 주고, 직접 못을 박기도 했는데 사라센은 이때의 망치질 덕분에 손목 힘이 강해져 훗날 골프 스윙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얼마 뒤 사라센의 아버지가 좋은 직장을 구하게 되면서 브리지포트의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됐고, 사라센은 무기 공장에 취직했다.


1918년 1월, 독감에 걸린 사라센은 일을 계속하다 급기야 쓰러지고 만다. 폐렴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라센은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한 달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의사는 등에 구멍을 뚫어 갈비뼈 사이로 폐에 찬 물을 빼내는 위험한 수술을 감행했다. 5월 말이 되어서야 퇴원할 수 있게 된 사라센에게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라면서 먼지가 많은 실내에서 하는 일을 삼가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받을 수 있게 야외에서 하는 일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그런 일이라면 늘 하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골프다. 처음에는 프로 캐디가 되려고 했지만, 캐디 출신 챔피언 월터 하겐과 위멧을 떠올리며 프로 골퍼가 되기로 결심했다.

 

골프 선수가 되기로 했으니 이제 연습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근처의 9홀 퍼블릭 골프장 비어즐리 파크를 찾아갔다. 이곳에는 알 시우시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PGA투어에서도 플레이한 경험이 있고, 주니어를 잘 가르치는 티칭 프로였다.


사라센의 캐디 경력을 들은 시우시는 사라센이 연습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3주 정도 칩 샷과 퍼트를 연습하면서 사라센의 몸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우드 샷도 연습할 수 있게 됐다.

 

그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연습을 계속했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시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줬다. 훗날 사라센은 이때 자기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시우시에게 평생 감사한다고 했다.


사라센의 아버지는 골프는 부자들의 스포츠이니 목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라센은 의사의 ‘주의사항’을 명분으로 골프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사라센이 위대한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아버지는 골프장 밖에서 아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딱 한 번 봤을 뿐 골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평생의 후원자를 만나다
사라센의 기량은 빠르게 발전했다. 비어즐리 파크에서는 아무도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스코어도 스코어지만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비거리도 일품이었다. 이때 알 시우시는 사라센을 자기가 키우는 주니어 프로로 여기며, 다른 골프장에 취직시켜 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매주 브루클론(Brooklawn) 골프클럽으로 가 조지 스펄링과 라운드를 했는데, 그에게 사라센을 소개하며 보조 프로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스펄링은 골프클럽 수리를 배운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로를 원했다.


대신 165㎝ 단신에 50㎏ 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격에 시우시나 스펄링보다 훨씬 멀리 장타를 친다는 얘기에는 구미가 당겼다. 사라센을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1918년 가을의 얘기다. 사라센은 16세가 됐다. 면접 날, 사라센은 깨끗한 옷을 골라 입고, 구두를 닦았다.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바싹 넘겨 붙였다.

 

 

그를 만난 스펄링은 잠시 그를 훑어보다 드라이버를 가지고 나왔다. 사라센은 공을 쳐보라고 할 줄 알고 자신감을 가졌지만, 스펄링은 그를 공터로 데리고 가 스윙을 해보라고 주문했다.


사라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스윙을 보여주려 애썼지만, 스펄링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는 “좀 더 다듬어야겠군”이라며 프로샵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기인 장타를 선보이지도 못하고 취직의 기회를 잃게 된 사라센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드라이버 스윙을 하고 있었다.

 

그때 프로샵 안에서 그를 지켜보는 중년의 신사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쌍둥이 형제 윌리·아치 윌러였다. 클럽에서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었고, 영향력 있는 멤버인 그들은 스펄링에게 “사라센의 스윙이 좋고, 재능이 있어 보이니 일자리를 주는 게 어떤가”라고 권유했다.


윌러 형제는 이날 이후 평생에 걸쳐 사라센의 후원자로서 우정을 나눴으며, 사라센도 훗날 이들 형제에 대해 “가족 다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요한 멤버들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던 스펄링은 마지못해 나와 멤버들의 골프채를 관리하고 프로샵을 청소하는 일을 제안했다.

 

주급 8달러의 박봉이었지만, 사라센은 일단 받아들였다. 집에 돌아온 사라센이 아버지에게 취직이 됐다고 자랑하니 “목수 일을 하면 주급 35달러는 받을 수 있다”며 화를 냈다.


스펄링은 새 직원인 사라센을 멤버들에게 소개하면서 “프로가 아니라 잡일하는 직원”임을 강조했다. 당연히 사라센에게 라운드의 기회는 없었고, 해 뜰 무렵의 새벽, 그것도 스펄링이 출근하기 전까지 급하게 몇 홀을 연습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윌러 형제는 일주일에 한 번쯤 들렀는데, 사라센에게 클럽 손질을 맡기고 팁도 충분히 주곤 했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니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라’는 무언의 격려였다.


1919년 겨울, 골프장이 문을 닫는 계절이라 사라센은 자기가 입원했던 브리지포트 병원에 취직했다. 시체를 옮기는 일이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사라센은 중요한 순간마다 집중력과 인내력을 발휘하는 멘탈을 다질 수 있었다고 했다.

 

박세리가 공동묘지에서 담력 훈련을 하게된 것도 이 일화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을지.


봄이 오고, 드디어 사라센에게 오후에는 페어웨이에서 연습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사라센의 기량을 목격한 멤버들이 스펄링에게 사라센과 라운드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음껏 기량을 발휘했고, 그의 놀라운 스코어가 클럽에 소문이 났다. 스펄링은 사라센의 라운드를 전면 허락해주고, 이제는 자신도 정기적으로 함께 라운드를 했다.

 

그러나 사라센은 때로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 있었다. 어느 날 숏 퍼트를 실패한 데에 분노한 나머지 퍼터를 꺾어버리고 말았다. 스펄링은 그런 사라센을 크게 나무랐다.

 

동반 라운드도 중단했다. 사라센이 자기 감정을 다스리기까지는 이후로도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소원해진 스펄링과의 관계는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코스가 텅 비어 있을 때 벌어진 내기를 계기로 회복됐다.


495야드 파 5인 4번 홀은 코스에서 가장 긴 오르막 홀이었는데 스펄링은 아무도 그 홀에서 투온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센은 “나라면 투온할 수 있다”며 5달러를 건 내기를 제안했다. 사라센의 건방진 태도를 고쳐주고 싶었던 스펄링이 내기를 받아들였고, 사라센은 보란 듯 3번 우드로 투온에 성공했다. 스펄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날씨에 투온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일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나의 후계자다!”


실제로 가을이 되자 스펄링은 사라센을 프로암 대회에 데리고 갔고, 사라센은 쟁쟁한 프로들을 물리치고 50달러의 상금을 받아 이에 보답했다.

 


시합의 높은 벽
사라센의 US오픈 첫 출전 결과는 처참했다. 스펄링의 도움으로 50달러를 번 것을 시작으로 100달러를 모아 플로리다로 향한 사라센. 물론 윌러 형제의 후원금과 지지를 등에 업고 이리저리 떠돌던 사라센은 포트 웨인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20년 당시 포트 웨인의 멤버들은 사라센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1920년 US오픈 출전을 후원했다. 예선에서는 3위를 기록해 희망적이었지만, 영국의 테드 레이가 295타로 우승했고, 사라센은 312타를 기록했다.

 

1921년 사라센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북쪽의 타이투스빌 골프 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트 웨인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헤드 프로인 램지 헌터가 자기 자리에 위협을 느끼면서 사라센과의 관계가 어색해졌기 때문이었다.

 

타이투스빌은 전체가 유전 지대였다. 당연히 멤버들은 모두 부자였다. 이들은 오전에는 거의 라운드를 하지 않아 사라센은 이때 연습을 했다. 멤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시합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1921년 US오픈에 나선 사라센은 우승자 짐 반스보다 22타나 뒤지며 다시 한번 쓴맛을 본다. 이때 첫 라운드에서 동갑내기 보비 존스를 만났는데, 둘은 훗날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사라센은 PGA챔피언십에도 나갔는데, 2라운드에서 디 오픈 챔피언인 조크 허치슨을 이기고 파란을 일으켰지만, 3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사라센의 피나는 노력에도 우승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우승은커녕 무명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해 가을, 한 멤버의 아들과 다툰 사라센은 타이투스빌에서도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내게 돈을 걸어도 될 거야’
1922년이 왔다. 타이투스빌을 그만두고, 과거 연이 있던 더치 로플러의 도움으로 피츠버그 하일랜드CC의 헤드 프로로 취직한 사라센이 아직 자리를 잡기도 전에 클럽은 US오픈에 참가할 것을 요청했다. 클럽은 US 오픈 1달 전부터시합 장소인 스코키 클럽으로 전지훈련을 가도록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파 70의 스코키는 깊은 러프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티샷이 페어웨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70%는 해결되는, 사라센의 플레이 스타일에 딱 맞춘 듯한 코스였다. 연습 라운드를 해본 사라센은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번 US 오픈에서 나에게 돈을 걸어라.’


시합 1주일 전, 다시 스코키에 연습 라운드를 간 사라센은 과거 2번 출전한 US 오픈에서 티잉 그라운드에서 그린까지의 샷을 위주로 연습했던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그린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훗날 사라센은 그린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합 전의 연습이라면 코스의 그린을 파악하는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골프장은 연습 그린과 코스의 그린 스피드가 다르다. 꼭 코스에 직접 나가서 그린 빠르기를 익혀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적어도 처음 3개 홀의 그린만이라도 완벽히 파악하라. 초반 홀에서 타수를 잃지 않는 것이 게임의 리듬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1922년 US 오픈 본선이 시작됐다. 72-73타를 친 사라센은 월터 하겐과 동타를 만들었다. 선두와는 3타 차가 났지만, 사정권 안이었다. 3라운드에서는 초반 부진을 극복하고 마지막 5개 홀에서 3개의 버디를 잡아내며 75타로 마무리했다. 선주 멜혼과 보비 존스에게 4타 뒤진 5위였다.

 


드디어 선두, 누군가의 꿈이 되다
4라운드 전반, 33타를 기록한 사라센이 드디어 선두를 잡았다. 후반 9홀이 시작되자 사라센은 오히려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소극적으로 플레이하려는 마음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반에는 없었던 갤러리들이 후반에는 수백 명으로 늘었다.


문제는 클럽하우스 리더인 멜혼의 290타였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사라센은 파만 하면 289타로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485야드 파 5홀이었다.


페어웨이 왼쪽에 OB가 있고, 오른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맞바람도 제법 불어왔다. 공략이 까다로울 게 뻔했다. 사라센은 캐디에게 “파를 목표로 안전한 플레이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캐디 도미니코의 의견은 달랐다.


“미스터 사라센,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버디를 목표로 한 공격이 필요합니다.”


사라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드라이브 샷을 날렸고, 공은 250야드 지점의 페어웨이 가운데로 떨어졌다. 맞바람에 240야드를 쳐야 온 그린이 가능했다. 사라센이 가서 보니 공이 놓인 라이는 좋았다. 다시 드라이버를 꺼냈다. 사라센의 두 번째 샷은 깃대 옆 5m 지점에 멈춰섰고, 버디를 잡아내 288타로 경기를 먼저 끝냈다.


이제 남은 선수들의 점수에 따라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게 됐는데, 결국 캐디의 예언에 가까운 조언이 들어맞았다. 경쟁하던 블랙과 보비 존스가 289타로 경기를 마친 것. 1타 차 우승이었다. 그렇게 사라센은 스무 살에 메이저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언론은 1913년 위멧의 우승 이후 가장 놀라운 우승이라고 보도했다. 겨우 스무 살의 캐디 출신 골퍼, 영국계도 아닌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많은 평범한 가정에 골프가 부자나 영국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닫게 만들었다.

 

사라센이 캐디 출신 골퍼인 하겐과 위멧을 보고 이 자리까지 왔듯, 이제는 그가 다른 이들의 꿈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