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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토리] “다 이루었다” 박수칠 때 떠난 보비 존스

가장 위대한 아마, 보비 존스가 세계를 제패한 비결 '올드맨파'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기계공학, 영문학,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3곳의 대학을 졸업한 수재. 메이저 대회에 31회 출전해 13회 우승, 톱10을 27회나 달성한 선수. 1930년 메이저 대회 4개를 싹쓸이하며, 기적적인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더니 28세의 나이에 그대로 은퇴해버린 쿨가이. 

마스터스의 창립자,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설이 된 골프 천재,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 보비 존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보비 존스(1902~1971), 메이저 13승
1923 US오픈
1924 US아마추어
1925 US아마추어
1926 US오픈 / 브리티시오픈
1927 US아마추어 / 브리티시오픈
1928 US아마추어
1929 US오픈
1930 US오픈 / US아마추어 / 브리티시오픈 / 브리티시아마추어
1930 은퇴 선언


‘박수칠 때 떠나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을 정도로 사실 떠날 때를 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떠날 때라고 인정하는 게 어려운 일이다. 주식이나 코인 판에서 특히 초보 개미들은 고점 잡기에 혈안이 된다. 고점에서 팔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내가 사면 오르고, 파는 순간부터 떨어져야 투자를 잘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거기서 모든 실수와 투자 마인드의 오류가 시작된다는 건 굳이 더 짚지 말자. 아프니까.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떨어진다
보비 존스는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로 손꼽히는 레전드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기계공학, 영문학, 법학을 전공할 정도의 수재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과적 두뇌와 이과적 두뇌를 겸비한 ‘문이겸장’이다.

 

그 와중에 평생 아마추어 골퍼로 활동하면서 메이저 13승을 올렸는데, 그가 28세가 된 1930년에는 무려 단일 시즌 그랜드슬램이라는 전무후무의 업적을 달성한다. 그리고 존스는 그해 11월 USGA를 통해 공식 은퇴 선언을 했다.


‘더 이룰 것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나이가 들면서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소진되며 승리를 향한 열정을 잃고 결국 전성기를 끝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재에 ‘재능충’인 그에게도 피 말리던 골프대회에 더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언젠가 존스가 프로선수가 되어 PGA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월터 하겐의 예상이 무색하게 존스는 평생 프로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은퇴 후 존스는 애틀랜타 지역의 유력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어 25세 때 이미 자서전 성격의 골프 경험담을 책(〈Down the Fairway〉)으로 발간할 정도였던 그는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많은 상금과 광고 수입 등의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아마추어 선수로 남다가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다.

 


‘유일무이’ 캘린더 그랜드슬래머
현대 골프에서 그랜드슬램이란 4개 메이저 대회, 즉 마스터스와 US오픈, 브리티시 오픈(디 오픈), PGA챔피언십을 모두 우승하는 것이다. 이 메이저 대회를 단일 시즌에 모두 우승하는 것이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다.

 

골프 역사상 한 해에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아직 없다. 자신의 커리어 중 4대 메이저를 모두 우승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로 봐도 5명에 불과하다. 진 사라센, 벤 호건,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다. 모두 알다시피 그 로리 매킬로이도 이걸 못해서 은퇴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소문이 있다. (농담이다)


지금의 그랜드슬램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랜드슬램은 1960년 아놀드 파머가 처음으로 ‘4개의 메이저 대회 석권’을 그랜드슬램으로 제시했다. 미디어도 이에 동감하며 현대 그랜드슬램의 정의가 확립됐다. 그러나 제1회 마스터스 대회가 열렸던 1934년 당시 골프에서 그랜드슬램이란 US오픈과 US아마추어, 브리티시오픈과 브리티시아마추어에서의 우승을 의미했었다. 당시에는 아마추어 골퍼들의 기량이 프로 골퍼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대로라면 프로 선수는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당시 프로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시 그랜드슬램의 정의는 다소 불합리했던 부분이 있다.

 

어쨌든 보비 존스는 1930년 한 해에 이 4개 대회를 모두 우승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로 인정받는다. 현존하는 모든 골프 대 기록 중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 중 하나가 바로 1930년 보비 존스의 그랜드슬램과 1945년 바이런 넬슨의 PGA투어 11연승이다.

 

“아마추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라틴어로 ‘사랑’입니다.
내가 프로로 전향하지 않는 건 골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에겐 골프가 돈이지 않습니까.”

―영화 〈보비 존스: 천재의 스트로크〉 중에서


보비 존스가 독학골퍼였다고?!
그럼에도 보비 존스의 그랜드슬램이 위대한 다른 이유는 그가 아마추어 골퍼였고, 늘 학업 또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골프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보비 존스는 조지아텍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이후 하버드에서 영문학 학사를 받고, 애틀랜타의 에머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된 수재였다. 프로 선수들처럼 자기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골프에만 집중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실제로 보비 존스는 자신에게 가족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으로 직업이 중요하며,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이 골프라고 했다. 심지어 존스는 모든 골프 시합의 결과는 ‘운명’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믿었다. 뒤에서 그의 커리어에 큰 도움을 줬던 2명의 귀인에 대해 소개하겠지만,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정식 골프 레슨을 받은 적이 없다.

 

존스는 특별한 체력 훈련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체력 단련은 골프에 필요 없는 근육을 발달시킬 뿐”이라며 “골프선수를 위해 가장 좋은 훈련은 골프를 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존스의 이론이 다른 선수들에게도 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아닐 가능성이 더 크고.

 

 

재능충 보비 존스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머리만 컸을 뿐 유난히도 몸통과 팔다리가 가늘었고, 5살이 될 때까지 일반식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성장한 뒤를 보면 타고난 골퍼의 체격을 가진 선수였다. 손이 크고 강했으며, 손목 힘도 특별했다. 어깨 근육도 강했는데, 무엇보다 자기가 가진 이러한 근력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현대에도 골프는 운동신경만으로 정복할 수 없는 운동이라는 게 중론이다. LPGA 명예의 전당에 빛나는 박세리도 레슨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타이거 우즈도 코치를 통해 7번이나 스윙을 갈아엎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때때로 나타나는 이런 돌연변이가 있다. 통계와 이론과 상식을 엎어버리는 ‘재능충’들 말이다. 남들이 피땀을 쏟으며 한땀 한땀 씨줄과 날줄을 쌓아갈 때 “이게 어렵나”라는 듯 ‘점프’해버리는 이들에게 때론 질투도 생기지만, 이런 캐릭터가 이야깃거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엄친아
독자들의 질투심을 조금 더 자극해본다. 보비 존스의 본명은 Robert Tyre Jones, Jr다. 1902년 3월 17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존스의 할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었다. 존스의 집은 애틀랜타의 이스트레이크CC 13번 홀 그린 근처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매년 PGA 플레이오프의 마지막 시합인 PGA 투어 챔피언십이 개최되는 명문 코스다.


존스의 아버지는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주말골퍼였다. 존스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 라운드를 하곤 했다. 당시 대부분의 위대한 골퍼들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캐디를 하며 골프를 배웠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재능충·엄친아에게도 처음은 있다
그런 존스에게도 첫 우승이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존스는 6세 때 처음으로 골프시합에 출전했다. 어른들이 꼬마들을 위해 마련한 시합이었는데 이 대회에서 존스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작은 트로피를 받았고, 그가 골프 선수로서의 모든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트로피로 남았다.


7세가 되면서 존스는 이스트레이크CC에서 플레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교 후에는 집 앞의 13번 홀 그린에 나가 오후 내내 쇼트 게임과 퍼트를 연습했다.


이스트레이크CC의 헤드 프로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Stewart Maiden이었다. Maiden은 ‘골프 스윙은 간결할수록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보비 존스에게 스윙의 이론을 가르치는 대신 “공을 최대한 강하게 치라”고만 주문했다.

 

그 영향으로 존스의 스윙은 간결했고, 인터벌이 거의 없이 스윙해버리는 스타일의 골퍼가 됐다. 가끔 존스가 레슨을 요청해도 특별한 스윙 교정 없이 “Hit it hard and it will land somewhere”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늘 이기기만 한 게 아니다’ 첫 번째 행운
보비 존스의 이름이 처음 신문에 난 것은 9세 때였다. 애틀랜타시 주니어 골프대회에 출전한 존스가 결승전 36홀 경기에서 16세의 유명 아마추어 선수를 5대 4로 꺾고 우승한 것이다. 이때부터 존스는 대형 선수가 될 만한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11세 때 존스는 이스트레이크CC의 올드코스에서 처음으로 80타를 쳤다. 코스가 길고 러프가 많아서 스코어를 줄이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적이었다.


이때 존스는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적은 코스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언제나 파를 목표로 하는 ‘Old man Par’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Old man Par
‘올드맨 파’는 보비 존스가 만들어 낸 신조어다. 본문에서는 그가 11세 당시 이를 깨달았다고 썼지만, 다른 설(?)도 있다. 전설의 골퍼, 해리 바든과 1920년 처음으로 동반 라운드를 가지게 된 존스가 바든의 경기 운영에서 ‘비밀’을 찾았다는 설이다.

존스는 그때까지 함께 라운드하는 상대방을 경쟁자, 이겨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골프를 해왔는데 바든은 달랐다. 바든은 경기 내내 존스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홀로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도 초연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경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든은 자기 마음을 온전히 다스릴 줄 알았고, 동반자나 캐디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보고 존스는 바든이 상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상대, 신적인 존재를 ‘올드맨 파’라고 부르기로 했다. 즉 골퍼는 상대방이나 경쟁자 같은 ‘사람’이 아니라, 골프 코스의 ‘파’라는 가상의 존재와 벌이는 18홀 게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존스는 걸출한 천재였지만, 18세까지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 이 ‘올드맨 파’라는 가상의 존재와의 게임을 하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그는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했다

 


존스가 전국구가 된 건 1916년이었다. US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존스는 예선 첫 라운드에서 74타를 써내며 깜짝 선두에 나섰다. 거의 모든 갤러리가 그의 오후 라운드를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89타로 부진했지만, 예선 32강에는 든 존스는 이때 갤러리의 존재가 시합을 좌우하는, 마치 ‘해저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걸 배웠다.


36홀 매치플레이로 진행되는 본선에서 존스는 1906년 챔피언 Eben Byers를 꺾고 8강에 진출한다. 뉴욕 타임스는 과거의 챔피언을 제압한 14세 천재 소년의 등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어진 8강전에서 존스는 전년도 챔피언 Robert Garner에게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가 미래의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존스는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때 자신이 챔피언이 되지 못한 게 자신의 ‘첫 번째 행운’이라고 회고했다.

 

존스는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나중에 이룩한 커리어들은 더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 패배로 배운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존스는 늘 “이긴 시합에서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챔피언 만드는 건 퍼트, 귀인을 만나다
존스가 14세 때 전국적으로 주목받던 US아마추어 선수권 대회 갤러리 중에는 Walter J. Travis가 있었다. 호주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인 그는 35세에 골프를 시작하고 US아마추어에서 3회나 우승하고, 브리티시아마추어에서 최초의 외국인 우승자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퍼트 그립인 ‘리버스 오버래핑 퍼트 그립’을 창안한 골퍼다. 왼손 검지가 오른손새끼손가락을 덮어 잡는 그립이다.


Travis는 존스에게 스윙은 좋지만 퍼트에 결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몇 년 뒤 존스의 퍼트가 더 나빠진 것을 발견한 그는 존스에게 딱 한 번 퍼트 레슨을 해줬는데, 이는 존스의 퍼트 실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


훗날 이를 바탕으로 퍼트 고수가 된 존스는 퍼트 이론에 대한 자기만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스트로크 때 몸과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존스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어깨를 움직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존스는 “몸과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퍼터 헤드를 조금만 빼서 스트로크를 하는 방식은 미스 퍼트를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자유롭게 긴 백스윙을 하더라도 ‘리듬’을 맞춘다면 좋은 퍼트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칩 샷은 골프에서 가장 훌륭한 경제학자다.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으면서도
스코어를 줄이는 효과는 크기 때문이다.”

―보비 존스

 


‘하룻강아지 보비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응? 이게 되네?’
보비 존스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1930년. 당대 최고의 프로 선수를 꼽아보면 10살 위인 월터 하겐이 있었고, 동갑내기인 진 사라센이 있었다. 보비 존스는 이들을 꺾고 US오픈 4회, 브리티시오픈 3회의 프로 대회 우승을 따내며 프로와 아마추어 양대 골프계를 동시 석권했다.


정작 존스는 이미 ‘뭔가 특별한 것을 이루고 은퇴하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27년 이후로는 메이저 대회가 아니면 참가를 꺼리기까지 했던 존스는 오거스타에서 열리는 ‘Southern Open’에 출전하는데, 여기서 Horton Smith라는 젊은 선수를 만난다.


우연히 룸메이트가 된 스미스는 (19)02년생인 존스보다 6살 어린 (19)08년생이었지만, 1929년에만 PGA투어 8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선수였다. 물론 보비 존스도 엄연히 당대 최고의 골퍼로 인정받는 선수였다. 그런데 젊은 스미스가 존스에게 스윙 지적을 해왔다.


“우리 존스 회원님은 숏 아이언 치실 때 코킹 좀 더 하고 다운스윙 하실게요.”


…라고는 안 했겠지만, 실제로 숏 아이언을 칠 때 다른 클럽보다 손목을 더 많이 꺾은(코킹) 상태에서 다운스윙을 시작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래야 볼을 더 깨끗하게 찍을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요즘 잘나가는 거 알겠는데, 어지간하면 출전조차 안 했을 비 메이저 오랜만에 한 번 나왔더니 이런 꼴을 당하네, 내가. 우연히 방 좀 같이 쓴다고 뭐 친해진 거 같냐?”


…라는 대꾸가 가슴 속에 울컥 차올랐다면 조금 마음을 넓게 쓰는 골퍼가 돼보자.

 


물론 사회적으로나 골프선수로나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삶을 사는 보비 존스의 자존감은 높았다. 이를 기억해뒀다가 실험해보니 그 작은 변화 하나가 신기하리만큼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존스의 약점이라고 지적되던 피치 샷이 확 개선됐다.


스미스는 또 헤드 페이스에 굴곡이 진 형태(concave face)의 샌드웨지를 쓰라는 조언도 했다. 벙커 플레이가 쉬워질 것이라는 거였다. 마침 존스도 평소 새로운 디자인의 클럽에 관심이 많았다. 즉시 실험해본 결과 이번에도 스미스의 말이 맞았다.

 

벙커 플레이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존스는 이 샌드웨지로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했으니 보비 존스에게 1930년의 스미스는 그야말로 ‘귀인’이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이 concave face 웨지는 구조상 임팩트 순간에 페이스에서 두 번의 터치가 일어난다는 이유로 R&A가 사용을 중지시켰다.


그래서 ‘서던 오픈’ 결과는 어땠냐고? 존스가 우승, 스미스가 2위를 했다. 훈훈한 결과라고? 두 선수의 타수 차이는 13타차였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인터넷 캡처

◆자료출처: 박노승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