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학, 영문학,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3곳의 대학을 졸업한 수재. 메이저 대회에 31회 출전해 13회 우승, 톱10을 27회나 달성한 선수. 1930년 메이저 대회 4개를 싹쓸이하며, 기적적인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더니 28세의 나이에 그대로 은퇴해버린 쿨가이. 마스터스의 창립자,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설이 된 골프 천재,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 보비 존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료 박노승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1930년 존스의 마음에는 ‘뭔가 특별한 업적을 남기고 은퇴하고 싶다’는 바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1927년 이후 메이저 대회 외에는 참가를 꺼렸던 그가 오거스타에서 열린 서던 오픈에 참가했다.
이게 신의 한 수가 됐다. 신예 호튼 스미스의 조언으로 약점이던 피치 샷이 크게 개선되고, 페이스가 오목한(concave face) 샌드웨지라는 ‘신무기’까지 장착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존스는 서던 오픈에서 2위를 한 자신의 은인(?)이자 영건인 스미스를 13타 차로 압살하며 우승했고, 이 대회에서 그의 플레이를 본 프로 선수들은 이제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소위 ‘넘사벽’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1930년에 존스를 꺾은 유일한 선수’
호튼 스미스 이야기
잠시 삼천포 샛길로 들어가 이 스미스라는 선수를 소개해본다. 호튼 스미스(Horton Smith, 미국)는 1908년생으로 보비 존스와는 6살 차이다. 그가 존스에게 칩 샷의 비기(?)를 전수하고 13타 차로 준우승한 서던 오픈의 일화만 들으면 단물만 빼 먹힌 듯한 이미지로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러나 보비 존스가 현대에도 회자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1930년에 그를 꺾은 유일한 선수가 바로 호튼 스미스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30년 2월에 열린 ‘사바나 오픈’에서였다.
1926년 ‘오클라호마시티 오픈’에서 프로로 데뷔한 그는 3년 차인 1929년에만 투어 8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건 아니다. US 오픈 기록만으로 보면 1927년 공동 44위, 1928년 공동 28위에 머물렀다.
그래도 존스에게 그랜드슬램의 밑거름이 된 칩 샷을 조언해 준 스미스의 인상은 강렬했던 모양이다. 보비 존스가 선수들을 ‘초청’해 벌이는 대회인 마스터스를 스미스는 그가 사망한 1963년까지 모두 참가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1934년 마스터스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며 존스의 초청에 호응했고, 상금왕을 따낸 1936년에 다시 한번 우승했다. 스미스가 올린 통산 30승 중 메이저 2승이 모두 마스터스에서였다.
이 꼭지, 백스토리에서 다루는 레전드 반열에 오른 선수는 아니라도 스미스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시즌당 1승에 그쳤지만 1929년부터 1937년까지 5회 연속 라이더 컵에 출전한 국대급 선수였다. 1935년 3승, 1936년 마스터스를 포함해 2승, 1937년 3승, 1941년 2승을 거두는 등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또 당시는 미국 투어의 확장과 재편의 시대였다. 아직 PGA투어가 설립되기 전이었고, 미국은 더 많은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점에 화려하게 등장한 호튼 스미스도 투어를 설립하는 데 일조한 선두 주자 중 하나였다. 이후 스미스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 3년간 PGA투어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호튼 스미스 상’도 제정됐다. 1965년에 시작된 이 상은 매년 PGA 교육에 탁월하고, 지속적으로 기여한 PGA 프로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다만 그가 1934년부터 1961년까지 내규의 일부인 PGA의 백인 전용 회원권 조항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2020년 7월 2일 이사회에 의해 ‘PGA 프로 발전상’으로 개칭됐다.
그랜드슬램 로드① 브리티시 아마추어
‘독사’와의 매치플레이
다시 존스의 그랜드슬램 로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30년, 존스가 브리티시 아마추어에 나섰다. 그랜드슬램을 위한 첫 번째 여정이었다.
대회는 시드니 로퍼라는 무명 골퍼와의 매치플레이로 시작됐다. 석탄 광산의 광부로 일했던 젊은 골퍼였는데 내기 골프꾼으로 실력을 다진 일명 ‘독사’였다. 다만 무명이었기에 주변에서는 이미 존스의 낙승을 예상했다.
1번 홀을 앞두고 로퍼와 악수를 나눈 존스는 그의 눈빛을 보고 쉽지 않은 라운드가 될 것을 직감했다. 과연 로퍼는 존스의 명성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플레이를 이어나갔다.
존스는 ‘이 매치가 영국에서의 라운드 중 베스트 라운드이자,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과정 중 가장 어려운 고비였다’고 회고했다.
그랜드슬램 로드① 브리티시 아마추어
‘행운’이 된 스타이미 룰
다음 고비는 전년도 챔피언 시릴 톨리(Cyril Tolley)와의 매치였다. 자타공인 영국 최장타자인 선수였다. 매 홀 존스보다 50~100야드 긴 드라이브 비거리를 선보였는데, 350야드인 18번 홀에서는 두 번이나 원온에 성공하기도 했다.
반면 존스는 정확한 샷으로 대항해나갔고, 매치는 팽팽한 접전이 됐다. 18번 홀에 끝났지만 두 선수는 아직 무승부였다. 존스와 톨 리가 각각 6홀씩 이겼고, 나머지 6홀은 비겼다. 승부는 서든데스로 가려지게 됐다. 이때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된다.
서든데스 1번 홀에서도 톨리의 장타가 나왔다. 존스는 흔들리지 않고 2번째 샷을 홀 3m 지점에 붙였다. 다음으로 2번째 샷을 어프로치로 하게 된 톨리의 미스가 나왔다. 어프로치가 그린 왼쪽으로 빗나간 것이다. 이어진 톨리의 3번째 샷은 홀 2m 지점에 멈춰섰다. 그런데 먼저 퍼트를 한 존스의 공이 약간 짧았다. 공교롭게도 톨리의 퍼트 라인을 가로막는 위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1952년에 폐지된 스타이미 룰이다. 이 룰에 따르면 매치플레이에서 퍼팅 그린 위의 볼과 홀을 연결하는 선상에 상대의 볼이 있어서 퍼팅에 방해가 되는 상태일 때, 두 볼의 간격이 6인치(15.24㎝) 이상이 되면 마크를 요구할 수 없으며, 전방의 볼을 피하거나 뛰어 넘겨서 퍼트해야 한다.
스타이미는 ‘볼을 있는 그대로 친다’라는 골프 정신의 구현으로 삼아 예전부터 많은 플레이어가 감수해온 룰이다. 그러나 이것을 역이용하여 퍼팅할 때 홀을 겨냥하지 않고 상대의 볼과 홀의 중간을 겨냥하여 고의로 스타이미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늘어나기 때문에 ‘페어플레이가 아니다’라는 취지에서 1952년에 폐지됐다. 참고로 현재까지도 스코어카드의 폭이 6인치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장면은 프란시스 위멧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내 생애 최고의 경기’에도 차용됐다. 결국 톨리는 그야말로 알아서 그 공을 피해야 했다. 칩 샷을 시도했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런 게 될 리가 없었다. 존스는 그렇게 서든데스 첫 번째 홀에서 행운의 승리를 거뒀다.
그랜드슬램 로드② 브리티시 오픈
전설에 ‘고춧가루캐’가 빠지면 섭하지
보비 존스의 그랜드슬램 로드 두 번째 여정은 ‘디 오픈’으로 불리는 브리티시 오픈이었다. PGA투어의 약진으로 유럽보다 미국 투어가 훨씬 커진 지금도 브리티시 오픈은 ‘가장 오래된 메이저 대회’라는 자부심을 잇고 있다.
디 오픈의 트로피인 클라렛 저그는 여전히 골프계에서 챔피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1930년 브리티시 오픈은 리버풀 호이레이크의 ‘로얄 리버풀GC’에서 개최됐다. 험한 러프와 사나운 바람이 관건인 이곳은 1897년부터 현재까지 13회나 브리티시 오픈의 개최지가 됐다. 2006년 타이거 우즈, 2014년 로리 매킬로이, 2023년 브라이언 하먼이 챔피언이 된 디 오픈의 개최지가 바로 이곳이다.
존스는 브리티시 아마추어에서 우승했지만, 심신의 피로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영국 땅을 밟아야 했다. 갑작스레 샷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20위(73-77타)로 예선을 통과한 존스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월터 하겐, 진 사라센, 토미 아무어 등의 선수가 불참한 것을 위안 삼고 희망의 끈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언론은 이번 대회를 ‘존스 vs 나머지’의 대결 구도로 예측했고, 도박사들은 존스의 우승확률을 4-1까지 예상했다. 부진한 예선을 치렀지만, 막상 1라운드가 시작되자 존스는 돌변했다. 70타를 써내며 공동 선두로 나서더니 2라운드에서 경쟁자들이 부진한 와중에도 72타를 치며 단독 선두 자리에 올랐다.
3·4라운드가 열리는 금요일 아침. 존스의 스타트는 좋지 않았다. 그때 존스에게 5타 뒤지고 있던 아치 캄스턴의 갤러리에서 큰 함성과 환호가 연방 터져 나왔다. 193㎝의 거한인 캄스턴은 1928년 월터 하겐과 72홀 매치플레이에서 18:17로 승리하며, 월터 하겐에게 생애 가장 큰 치욕을 안긴 선수였다. 이날 그는 68타로 코스레코드를 세웠다.
보비 존스의 생각이 맞다. ‘될놈될’인 거다.
다만 내가 될 놈인지 아닌지 확신을 못 하니 포기도 못 할 뿐인 거지.
그랜드슬램 로드② 브리티시 오픈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될놈될놈될놈될……
존스는 74타로 3라운드를 끝내고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캄스턴에게 1타 차이로 역전돼 2위로 내려앉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뜩이나 존스는 메이저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리드할 때 샷이 흔들리는 징크스, 솔직히는 ‘약점’이 있었다. 이 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11번 홀에서 3퍼트를 범하더니 12번 홀은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했다. 13번 홀에는 볼을 벙커에 빠뜨리고, 14·15번 홀에서도 페어웨이를 놓치는 등 아슬아슬한 플레이를 펼쳤다. 4라운드 결과는 75타였다. 그러나 일이 되려면 천운이 따른다고 했던가. 아니, 그냥 알기 쉽게 ‘될놈될’이라고 하자.
캄스턴이 초보자나 할 만한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오후의 마지막 4라운드를 남겨두고 선수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반면,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캄스턴은 연습장으로 가 50개 이상의 연습 볼을 친 것이다. 체력과 컨디션이 좋더라도 정신적 피로가 쌓였으니 머리를 쉬어줘야 했다. 결과적으로 3라운드에서 코스레코드까지 작성하며 기염을 토한 캄스턴은 4라운드에서 볼품없이 무너지고 만다. 1번 홀부터 80㎝짜리 퍼트를 놓치더니 2번 홀에서는 섕크를 내는 등 부진이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1930년 디 오픈에서 존스를 가장 크게 위협할 줄 알았던 캄스턴은 4라운드에서 82타를 기록하고 말았다. 존스는 2위와 2타차를 벌리며 우승하며 그랜드슬램 로드의 2번째 여정을 마쳤다. 개인 통산 3번째 브리티시 오픈 우승이었고, 19세 때 라운드 도중 스스로 기권한 걸 제외하면 3전 3승의 결과였다. 또한 보비 존스는 아마추어 선수로서 디 오픈의 클라렛 저그를 들어 올린 마지막 선수가 됐다.
그랜드슬램 로드③ US 오픈
별들의 전쟁, 아니 별과의 전쟁
이제 남은 그랜드슬램 로드는 미국 땅에서의 두 대회였고, US 오픈(인터라켄CC, 미니애폴리스)이 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프 팬과 미디어도 그의 그랜드슬램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경우 은퇴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첫날 라운드가 시작됐다. 3달러짜리 티켓은 이미 매진이었다. 몰려드는 기자들을 위해 USGA는 무려 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역대 최대의 프레스센터를 마련했다. 그 덕에 이 경기는 CBS 방송을 통해 최초로 전국에 라디오 생중계됐다.
지난 디 오픈에서 당대 최고의 미국 선수들이 다수 빠진 것과는 달리, 1930년 US 오픈은 ‘사상 최강’이라고 평가될 만큼 쟁쟁한 선수들이 죄다 모인 대회가 됐다. 메이저 11승에 빛나는 베테랑 월터 하겐(당시 38세)이 챔피언으로의 복귀를 벼르고 있었고, 진 사라센이나 레오 디겔 등도 최상의 컨디션을 공언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도 역시 존스 대 나머지 참가자의 대결 구도를 예상했다.
그랜드슬램 로드③ US 오픈
그랜드슬램의 전조가 된 ‘물수제비’
대회 첫날 37℃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1라운드가 시작됐다. 이미 절반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존스는 큰 사고 없이 선두권을 유지하는 보수적 플레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에서 71타를 친 존스는 토미 아무어 등에게 1타 뒤진 3위에 올랐다. 월터 하겐과 호튼 스미스 등이 72타로 바짝 추격해왔다.
2라운드에서 존스는 호튼 스미스의 뒷 조에서 플레이하게 됐는데, 9번 홀 485야드의 파5에서 호튼 스미스가 멋진 이글퍼트를 성공하며 선두로 나서는 것을 목격했다. 이에 존스도 투온 공략을 노리며 3번 우드로 두 번째 샷을 했다. 그때 갑자기 페어웨이로 걸어 나온 2명의 갤러리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를 의식한 존스는 토핑을 치게 됐고, 공은 그린 앞 연못을 향해 낮게 날아갔다. 관중들의 탄식이 들리던 그때 공이 이른바 ‘물수제비’처럼 수면을 몇 번 차고 오르더니 연못을 건너 언덕 위에 멈춰섰다. 다행히 존스는 칩 샷으로 홀에 붙이며 버디를 잡아냈고, 전반 9홀을 마쳤다.
10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이를 지켜보던 호튼 스미스는 ‘누구도 존스를 막을 수 없다’는 걸 느꼈다. 후반 9홀에서 존스는 보기와 더블보기가 있었지만 73타로 라운드를 마치며 공동 2위에 올랐다. 이때 70타로 존스와 2타 차 선두를 이루던 선수는 22살의 청년 호튼 스미스였다.
그랜드슬램 로드③ US 오픈
경쟁자마저 ‘본 헤드 플레이’를 해주네
3·4라운드가 열리는 마지막 날 오전 라운드에서 존스는 68타로 코스레코드를 세우며 선두로 나섰다. 존스보다 2시간 늦게 출발했던 스미스는 이미 선두를 뺏긴 걸 확인하고 라운드를 시작해야 했다. 207타의 존스가 선두, 2위는 무려 5타차인 쿠퍼였고 스미스는 6타 차로 3위였다. 존스의 우승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선두 존스의 약점이자 습관이 고개를 들었다. 메이저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선두일 때 부진해지는 바로 그 점 말이다.
전반 9홀을 38타로 끝낸 존스였지만 쿠퍼와 스미스가 36타로 2타와 3타로 차이를 좁혔다. 러프가 긴 US 오픈에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박빙의 리드였다. 아니나 다를까. 13번 홀 파3에서 존스의 티 샷이 벙커에 빠졌다. 이미 호튼 스미스의 조언으로 벙커 플레이를 크게 개선한 존스였지만, ‘메이저/FR/선두 징크스’를 피하지는 못했다. 2타 만에 겨우 탈출한 존스는 더블보기를 써냈다. 이제 우승의 향방을 알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존스에게는 또다른 징크스도 있었다. 리드를 다 잃고 위기에 부딪히면 다시 자신의 기량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14번 홀과 16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다소 안정을 찾았다.
그랜드슬램 로드③ US 오픈
지금도 논란거리인 17번 홀 판정
그리고 17번 홀, 보비 존스의 그랜드슬램이라는 업적에는 치부와도 같은 ‘편파성 시비’ 사건이 벌어졌다. 17번 홀은 파3 225야드 홀이다. 존스의 티 샷이 슬라이스가 나며 우측 숲으로 사라졌다. 공이 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없어서 갤러리와 진행 요원이 모두 나서 공을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OB 판정이 된다면 존스는 다시 티 샷을 해야 했지만, 대회 직전 나무가 있는 지역에 볼이 떨어진 경우 ‘병행 워터해저드’로 규정된 곳이었기에 1벌타를 받고 2클럽 이내의 드롭이 가능했다.
여기서 편파성 논쟁이 나온다. 목격자가 없었으니 공이 병행 워터해저드에 떨어졌다는 증거도 없었고, 해저드 경계 이전 구역도 러프가 길어 분실구의 가능성이 충분했는데도 USGA의 심판관이 워터해저드 드롭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드롭을 한 존스는 결국 더블보기 즉, 5타로 홀을 막을 수 있었는데 티 샷을 다시 했다면 7타도 충분히 나올 만한 홀이었기에 이는 존스에게 유리하도록 판정이 내려졌다는 논쟁을 낳았다.
우여곡절 끝에 18번 홀을 버디로 마무리한 존스는 75타로 합계 287타를 써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존스는 아마추어였기에 1천 달러의 상금은 289타를 친 맥도널드 스미스에게 돌아갔고, 호튼 스미스는 292타로 3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상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존스의 4번째 US 오픈 우승이었으며 그랜드슬램 로드의 3번째 기둥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US 아마추어였다.
그랜드슬램 로드④ US 아마추어
운명론자라서 마음 편했던 보비
1930년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US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는 9월 17일 필라델피아의 메리온 크리켓 클럽에서 열렸다. 이에 앞서 불과 6주 사이에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존스에게는 꿀맛이었을 10주의 휴식기가 있었다. 이때 존스는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고 결심한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다’
메리온 크리켓 클럽에서 시작한 존스의 커리어는 이곳에서 정점을 찍고, 이곳에서 마무리됐다.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을 앞두고 긴 휴식기를 보냈고, 결과를 떠나 은퇴 경기로 치르겠다고까지 결심했으니 머릿속이 복잡했을 법도 했지만, 존스는 달랐다. ‘골프 시합의 결과는 언제나 운명적인 것이기에 선수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게 존스의 지론이었다.
그랜드슬램 로드④ US 아마추어
골프는 몰라도 보비 모르면 간첩
1924년 이곳에서 처음 US 아마추어를 우승했을 때의 결승전보다 많은 갤러리가 존스의 첫 연습 라운드에 몰렸다. 갤러리 중에는 골프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단지 유명한 보비 존스를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축구는 몰라도 호날두, 메시는 안다’는 말이 당시에도 통용됐던 모양이다.
USGA는 몰려드는 갤러리를 관리해야 했지만, 인력이 부족해 곤혹스러웠다. 결국 해군 장병들이 군복을 입고 나와 도움을 줬다. 대민지원도 이 정도면 차출이 아니라 희망자만 받아도 충분했을 터다.
10주간의 휴식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정작 존스는 연습 라운드를 73-78타로 끝내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곳은 심지어 파 70코스였으니 그랜드슬램을 운운하는 선수로서 자존심이 상했을 만도 하다.
그립과 어드레스가 편하게 나오지 않았다. 연습장으로 간 존스는 공 위치가 평소보다 오른발 쪽으로 이동해있다는 걸 발견해 바로잡았고, 다행히 샷은 다시 좋아졌다.
그랜드슬램 로드④ US 아마추어
해묵은 빚도 갚았겠다, 더 이룰 게 없긴 했네
예선이 끝나고 매치플레이에 나갈 32명의 선수가 결정됐다. 존스 외에 팬과 미디어의 관심을 받는 선수는 없었다. 첫 매치와 16강전을 5대 4로 승리하고 8강전을 6대 5로 승리해 준결승에 진출한 존스는 동갑내기의 오랜 친구 제스 스위처와 맞붙게 된다.
스위처는 예일대를 졸업한 수재였고, 존스와는 수없이 많은 대회에 함께 출전했고 워커 컵 미국 대표로 원정 경기도 다녔던 절친하면서도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두 선수가 공식 대회에서 상대로 만난 건 1922년 US아마추어 준결승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존스는 8대 7로 패배했었는데 존스의 골프 경력에서 가장 일방적인 패배로 평가된다. 또한 스위처는 이미 1926년 존스보다 먼저 브리티시 아마추어를 우승하면서 최초의 미국 태생 우승자로 등극한 선수였다.
이번엔 달랐다. 존스는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리드를 잡아 9대 8로 승리하면서 8년 전의 묵은 빚을 갚았다.
“모든 골프 시합의 결과는
언제나 운명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
선수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
-보비 존스
그랜드슬램 로드(完)
전무후무할 캘린더 그랜드슬램
결승전은 36홀 매치플레이로 진행됐다. 관중은 계속 불어나 어느새 골프대회 사상 최대인 1만8천 명을 기록했다. 상대는 유진 호먼스였는데 그는 초반부터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존스의 승리와 전무후무할 그랜드슬램이 굳어지는 동안 존스의 아버지는 나무 뒤에 숨어서 아들을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나타나면 경기에서 지던 징크스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이쯤 되니 존스에게는 기량 외적인 징크스가 꽤나 많았던 것 같다. 한편 존스는 마지막 시합까지 스틸 샤프트를 거부하고 히코리 샤프트 클럽을 사용했는데 물론 손에 익은 클럽을 선호하는 건 골퍼라면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 역시 일종의 징크스는 아니었을까.
존스는 11번 홀에서 8대7로 경기를 끝냈다. 존스의 13번째 메이저 타이틀이자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완성된 것이다. 1930년 9월 27일이었다.
보비 존스의 그랜드슬램 여정을 들여다보면 압도적인 퍼포먼스보다 꽤 많은 우연과 행운이 뒤따랐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대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건 그러한 우연과 행운이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연달아 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비 존스의 지론인 ‘골프의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물론 ‘결과는 미리 정해진 건데 아버지는 왜 대회장에서 숨어있게 했나?’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말이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는 축복
‘박수칠 때 떠난 사람입니다. 질문받습니다’
이곳 메리온은 존스가 1916년 생애 처음으로 출전한 US 아마추어의 개최지다. 1924년 존스의 첫 US 아마추어 우승 당시의 개최지도 이곳 메리온이었다. 그리고 선수 경력의 마지막이 된 그랜드슬램 타이틀도 이곳 메리온에서 달성했다.
스포츠는 결국 기록과 기억으로 남는다. 시작한 곳에서 화려한 끝맺음을 하고 싶다는 건 모든 스포츠 선수들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거나, 원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자신에게 의미가 큰 곳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역대 최대 규모의 팬 앞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 아닐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