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문채형 기자 | 한국 제약산업의 모범 사례로 꼽히던 HK이노엔이 내부 오너 일가 분쟁으로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2018년 한국콜마가 CJ헬스케어를 인수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키운 이 회사는, 자체 개발 신약 ‘케이캡’을 바탕으로 9천억 원대 매출을 기록하며 국내외 시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남매 간 경영권 다툼이 폭발하면서 회사의 존립과 성장 동력 모두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HK이노엔의 위기는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치명적 병폐를 재확인시키는 신호탄이다. 한국의 많은 중견 대기업에서 반복되는 ‘오너 리스크’는, 경영의 전문성과 연속성을 훼손함으로써 기업 가치를 갉아먹는 주범이다. 특히 제약산업처럼 장기간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규제당국의 까다로운 승인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고위험 고수익 산업에서는 경영 안정성이 생명줄과 같다.
경영권 분쟁이 경영진 교체와 의사결정 지연으로 이어지면,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물론 글로벌 임상과 허가 일정까지 차질이 불가피하다. 해외 파트너는 신뢰를 잃고 협력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글로벌 경쟁력은 눈에 띄게 약화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는 기업 내부 구성원뿐 아니라, 투자자와 국민 보건에도 고스란히 전가된다.
HK이노엔 사태는 한국 기업들이 오랫동안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영은 오너의 것’이라는 전통적 문화는, 전문경영인 체제와 이사회 독립성 강화라는 현대적 경영원칙과 충돌한다. HK이노엔 역시 외형적으로는 전문경영인을 중심에 둔 경영체제를 유지했지만, 핵심 의사결정은 여전히 오너일가의 권한과 감정에 좌우됐다.
이사회는 사실상 ‘형식적 감시기구’에 머물렀고, 주주총회나 기관투자가도 적극적인 견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 자본시장에서 기관투자가들의 소극적인 의결권 행사는 유명무실하며, 이로 인해 오너일가의 무책임한 경영권 다툼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한국 기업의 밸류에이션 저평가 문제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준다. 해외 투자자들은 ‘언제 또 오너 리스크가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이 불안감은 단순한 재무지표가 아니라 기업의 투명성과 안정성, 지배구조 건전성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HK이노엔이 아무리 혁신적 신약을 개발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 성공해도, 이런 근본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선뜻 고평가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 제약산업뿐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 전체가 불필요한 할인을 감내하게 되는 구조다.
HK이노엔 사태는 단지 경영권 분쟁이 아니라, 기업의 본질적 존재 이유와 책임에 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기업은 오너 가족만의 사유물이 아니다. 임직원, 투자자, 협력사, 그리고 국민 건강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오너 일가가 사적 감정에 휘둘려 기업 가치를 훼손한다면, 이는 명백한 사회적 책임 위반이다. 한국 기업은 이제 ‘책임경영’이라는 구호를 넘어, 투명하고 견고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수다. 이사회 기능 강화, 기관투자가의 적극적 역할, 법·제도적 제재 장치 도입 등 다각도의 개혁이 시급하다.
HK이노엔이 맞닥뜨린 위기는 한국 제약산업과 자본시장이 마주한 ‘오너 리스크’라는 뿌리 깊은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약산업이 한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로서 자리 잡는 데 근본적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이 진정한 글로벌 강자로 성장하고 싶다면, 전문경영과 투명한 지배구조를 정착시키고, 오너 일가의 무책임한 개입을 근절해야 한다. HK이노엔 사태가 단순한 위기가 아닌, 전환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