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서주원 기자 | ‘우리나라 전통주의 자존심’을 지금까지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키겠다고 공언해 온 전주 이강주(李薑酒)의 조정형 회장은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 하마터면 박정희 정권의 시월유신을 찬양하는 ‘호남유신문(湖南維新門)’이 될 뻔했다고 지난 21일 회고했다.
‘유신쿠데타’라는 별칭을 가진 ‘시월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다.
전주 입성을 알리는 상징물인 호남제일문은 현재 덕진구 여의동에 서 있다. 1977년 처음 건립됐다. 왕복 4차선 도로에 폭을 맞춰 세워졌다. 높이 5m, 길이 18m 규모의 시멘트 시설물이었다.
1991년 전주에서는 제72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이 전국체전을 치르려고 전라북도는 전주 진입로를 종전의 25m에서 50m로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호남제일문이 헐렸다.
1994년 전통 한옥의 팔작지붕 구조로 다시 세웠다. 오늘의 모양새를 갖춘 건 그때였다. 당시 전주시는 호남제일문 복원 공사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하는 계획까지 포함시켰다. 그러나 사업비 20억 원을 확보할 길이 없어 육교 기능을 갖춘 일주문 형태로 축소했다.
기린대로를 가로지르는 호남제일문은 길이가 43m, 폭은 3.5m, 높이는 12.4m다. 전국에서 가장 큰 일주문이다. 전주 완산구엔 전라감영이 있다. 오늘의 모양새는 근래에 복원된 것이지만 원래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관할하던 지방관아였다. 오늘의 도청에 해당된다. ‘호남제일문’의 명칭은 이 전라감영에 뿌리를 두었다고 전해온다.
이강주 조 회장은 “유신 시절, 전라북도가 전주를 상징할 일주문을 건립하려 할 때, 박정희 정권은 문의 이름을 ‘호남유신문’으로 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일주문 건립 사업의 실무를 맡고 있던 선친이 정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선친은 중앙정보부의 시찰을 받았고, 나와 내 동생도 시련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조 회장은 “중정 요원들이 선친을 압박하며 뒤를 따라다녔다. 내겐 뜬금없는 노름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직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동생은 신원조회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 무렵, 야당 집안으로 찍힌 우리 집안엔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는데, 듣기로는 박정희 정권에 빌붙은 자들이 아부를 하려고 정부에 일주문의 명칭을 ‘호남유신문’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덧붙였다.
조 회장의 선친은 작촌(鵲村) 조병희 선생이다. 생전 ‘전북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았다. 작촌은 외삼촌이었던 가람 이병기의 영향을 받은 시조 시인이다. 한학과 서예의 조예도 상당했다. ‘호남제일문’의 명칭은 작촌의 지조와 절개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