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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정릉골 재개발①] 총회는 없었다…700억 계약 변경이 만든 구조적 위기

총회는 없었다, 도정법은 무너졌다
700억 계약 변경, 조합원 배제된 의사결정
절차 생략이 만든 금융위기와 이자 부담
기득권 저항 속 조합원 신용·생존권 위협

지이코노미 문채형 기자 | 정릉골 재개발의 위기는 ‘자금 부족’이 아니라 ‘절차의 붕괴’에서 시작됐다. 조합원 총회라는 최소한의 의사결정 절차 없이 700억 원 규모의 계약 구조와 금융비용 부담이 변경됐고,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시공사와 행정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위기는 구조적으로 고착됐고, 이자 미납과 조합원 신용 하락이라는 현실적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본지는 정릉골 재개발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지금이라도 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짚기 위해 3회에 걸친 심층 기획을 시작한다. ①편에서는 총회 없이 이뤄진 중대 계약 변경의 실체를, ②편에서는 이를 방치한 시공사와 행정의 책임을, ③편에서는 남은 해법과 책임의 방향을 차례로 추적한다.

 

 

정릉골 재개발 사태는 단순한 유동성 위기가 아니다. 조합원 총회라는 법적·절차적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채, 700억 원 규모의 계약 구조와 금융비용 부담이 변경되면서 위험이 누적된 구조적 결과다. 그 위험을 알고도 바로잡지 않은 선택들이 오늘의 위기를 만들었다.

 

조합 내부 자료와 대의원회 회의자료에 따르면, 정릉골재개발조합은 조합원 총회 의결 없이 이사회 및 대의원회 의결만으로 시공사인 포스코이앤씨와의 계약 내용을 변경했다. 변경 대상은 △직접대여금(입찰보증금) 700억 원 반환 구조 △필수사업비 및 금융비용 부담 주체 등으로, 사업 수익성과 조합원 부담에 직결되는 핵심 사안들이다.

 

대의원회 회의자료에는 계약보증금 700억 원의 반환 시기를 기존 ‘준공 후’에서 ‘착공 전’으로 앞당기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금융기관 차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비용 역시, 당초 계약서상 ‘시공사 부담’으로 명시돼 있던 구조가 사실상 조합이 떠안는 방식으로 변경된 정황이 확인된다.

 

이 같은 계약 변경은 조합 내부의 일방적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북부지법은 임동하 조합장 당선무효 효력정지 가처분 사건 결정문에서 “시공사 선정 당시 정기총회에서는 계약보증금을 ‘준공 후 시공사에 반환’하기로 결의했으나, 이후 협의 과정에서 ‘착공 전 반환’으로 변경됐다”고 명시했다. 법원은 임동하 조합장의 공약에 등장하는 ‘사라진 조합재산, 이행보증금 700억 원 환수’ 주장이 바로 이 계약 변경 문제를 지칭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계약 구조 변경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조합원 총회 의결이 반드시 필요한 중대 사안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사업비 부담 구조를 바꾸거나 조합에 중대한 재정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계약 변경은 총회의 명시적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변경은 총회에 상정되지 않았고, 다수 조합원은 변경 사실 자체를 사후에 인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결과 조합의 재정 구조는 급속도로 흔들렸다. 조합은 매월 약 10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이주비 대출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올해 9월 이후 신규 차입이 중단되면서 기존 대출 잔액을 이자 납부에 소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 내부에서는 “12월 이자 납부 이후 조합 계좌가 사실상 바닥난 상태”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자 납부가 중단될 경우 약정 이자율의 두 배에 달하는 연체이자가 발생하고, 일정 기간 경과 시 법적 정리 절차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주비 대출 이자가 연체되면 조합원 약 400여 명이 개별 연체자로 전환돼 신용등급 하락, 금융거래 제한 등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위기의 출발점은 전임 조합장 천재진 씨 재임 시기에 이뤄진 계약 구조 변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 전 조합장은 계약 변경 이후 법적 책임 논란이 불거지자 사퇴했지만, 문제의 계약 구조는 바로잡히지 않았다. 이후 민주적으로 선출된 임동하 조합장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으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신임 조합장을 1년째 흔들고 있으며, 그 결과 사태를 바로잡을 기회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시공사인 포스코이앤씨는 변경된 계약 구조에 따라 입찰보증금 700억 원과 관련 금융비용을 회수한 반면, 조합은 금융비용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조합 내부에서는 “시공사에 유리한 계약 변경이 조합원 피해로 직결됐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정릉골 재개발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배경에는, 조합을 사실상 100% 차입 구조에 의존하도록 만든 일련의 결정들이 자리하고 있다. 직접대여금 700억 원을 조기 반환하고, 금융비용 부담을 조합에 전가하는 계약 변경을 승인한 전임 조합장 천재진 씨와 당시 이사회·대의원회 관계자들은 그 결과로 발생할 자금 리스크를 관리할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조합의 장기적 안정성이나 조합원들의 부담은 외면한 채 자신들의 재무적 이익을 우선한 시공사의 행태다. 그 결과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조합원과 그 가족들은 이주비 대출 연체, 신용도 하락, 생계 위협이라는 현실적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수습’이 아니라, 조합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의사결정의 책임 주체들에 대한 엄정한 규명과 책임 추궁이다. 절차를 무너뜨린 결정이 어떤 대가를 남겼는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결론 없이는 정릉골 재개발의 위기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는 다음 회차에서 이 같은 구조적 위기를 인지하고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시공사와 행정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