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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화차’로 나라를 지킨 충현(忠賢) 망암 변이중 선생 재조명

- 임진왜란 속 ‘화차’ 제작해 행주대첩 승리에 큰 공 세워
- 실천적 유학과 국방 과학 융합한 선비 정신, 후대에 귀감
- 장성군, 봉암서원 내 ‘화차 체험장’ 조성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

 

지이코노미 김정훈 기자 | 조선의 위기가 곧 학문의 시험대가 되었던 임진왜란. 그 격동의 시대 속에서 학문과 과학 기술을 결합해 조국을 지킨 한 선비가 있었다. 장성군이 10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한 망암 변이중(望巖 邊以中, 1546~1611) 선생이다.

 

망암 변이중은 장성읍 장안리 봉암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병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안위와 국방 체계에 대해 늘 고민했다. 실천적 유학 정신은 훗날 조선을 지탱한 국방 과학의 기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소모사로 임명돼 6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죽산전투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군의 조총에 맞서기 위해 사재를 털어 신식 화포 ‘화차(火車)’를 제작했다.

 

수레 형태의 화차는 네 방향에 방호판을 두르고, 내부에 병사가 탑승해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승자총통 40정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던 이 무기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으로 평가받았다.

 

망암 변이중이 만든 화차는 전장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해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이를 본 조정은 전국적으로 화차 제작을 명령했다. 이후 300여 대의 화차가 제작됐으며, 그중 40대가 행주산성 전투에 투입돼 ‘행주대첩’의 대승을 이끌었다. 조선 전쟁사뿐 아니라 동양 군사 기술사에도 길이 남을 업적이었다.

 

무기 제작자에 머물지 않고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두드러졌다. 실학과 병학을 아우르며 과학기술의 가치를 꿰뚫어 본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저서 ‘망암집’에는 유학자로서의 학문적 고찰뿐 아니라 국방 철학과 병기 운용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학문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신념은 조선의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났다.

 

현재 장성 봉암서원과 경기 고양 행주서원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지역에서는 매년 제향을 올리며 충현의 뜻을 기리고 있다. 봉암마을 일원에는 ‘망암 변이중 생가 터’가 남아 있어 조선 국방 과학의 현장을 되새기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장성군은 지난 8월 봉암서원 내 시징당을 철거하고, 망암 변이중의 업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화차 체험장’ 건립에 착수했다. 이 공간은 전시를 넘어 조선의 기술과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되고 있다. 완공 이후에는 청소년 역사캠프와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돼, 지역 인물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교육의 현장이 될 전망이다.

 

김한종 장성군수는 “망암 변이중 선생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겨 조국을 구한 장성의 위대한 선현”이라며 “그분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기술과 지식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장성군은 이 같은 역사 자산을 널리 알리고, 군민의 자긍심으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붓 대신 화차를 든 한 선비. 망암 변이중의 삶은 오늘날 장성의 역사 속에서 다시 빛나며, 배움과 헌신, 그리고 나라 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